조선, 부패로 망하다 (6) - 흥선대원군의 등장
조선, 부패로 망하다 (6) - 흥선대원군의 등장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0.12.28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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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12월 8일에 33세의 철종이 후사 없이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대왕대비(大王大妃) 조대비(신정왕후)는 흥선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둘째 아들 이명복(李命福 1852~1919)을 임금으로 정했다. 나이 11세의 고종(재위:1863~1907)이었다.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

고종 즉위 1달 뒤인 1864년 1월 10일에 수렴청정한 대왕대비가 대신들에게 정사를 잘하도록 명했다. (고종실록 1864년 1월 10일)

"아! 우리 대행대왕(大行大王 철종을 말함)께서는 하늘을 본받아 무위(無爲)로 다스리셨고 선을 좇음이 물 흐르듯 하여, 정사에 해로운 것은 한 번도 생각하신 적이 없고 백성들에게 이로운 것에 대해서는 한 가지도 망설이신 적이 없다. 안으로는 옷과 타는 것, 기호품과 같은 것을 사치하게 하지 않으셨고, 밖으로는 궁실이나 후원을 꾸미기 위해서 공사를 벌이지 않으셨다. 재위(在位)하셨던 14년 동안은 바람이 고르고 비가 순하여 해마다 풍년이 들었으니, 응당 창고마다 차고 넘치는 저축이 있었고 백성들도 곤궁한 걱정을 몰랐으며 인구도 늘고 물산까지 풍부해지는 효과를 거의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나라의 재정은 고갈되고 백성들은 곤궁해지며, 기강이 해이해지고 풍속이 무너짐이 날로 더욱 악화되어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근심과 원한을 참지 못해 윤리를 어그러뜨리는 무리가 나오고 고혈을 짜내는 것을 견디지 못해 명분과 절차를 번하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 슬프도다, 슬프도다! 차마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아! 감사(監司)나 병사(兵使)와 수사(水使), 그 이외의 모든 관리들이 나라를 위해서 애를 쓴 일은 무엇이고, 임금을 위해서 충성을 다한 일은 무엇인가? ... 아! 오늘날의 대부(大夫), 경사(卿士), 백료(百僚), 서윤(庶尹) 가운데 대대로 벼슬을 살아오면서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해야 할 처지에 있지 않은 사람이 누구인가? 그 조상 때부터 모두가 명분과 절의를 지키고 염치를 차려 우리의 선대 임금들을 도왔는데, 명분과 절의가 완전히 무너지고 염치가 송두리째 없어진 것이 오늘보다 더 심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 나라가 이렇게 위태롭게 된 책임을 누가 져야 하겠는가?

옛사람들이 명분과 절의라고 하던 것을 지금 사람들은 중히 여기지 않고, 옛사람들이 수치로 여겼던 것을 지금 사람들은 조금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 탓에, 염치와 예의는 자취를 감추고 개인의 탐욕만 늘어나 이리저리 부산하게 돌아다니는 자들은 모두 잇속만을 구할 뿐이다.”

대왕대비는 탐욕을 질타했다. 이는 안동김씨의 척결을 예고한 것이다.

명령은 이어진다.

“금석(金石)처럼 굳게 지켜야 할 법조문은 빈 문서로 여기고 작고 큰 뇌물 뭉치를 받아먹는 것을 좋은 일로 여기니, 대각(臺閣 사간원과 사헌부)에서는 강직하게 간쟁하는 말이 들리지 않고, 전형(銓衡)에서는 공평한 정사를 보지 못한 지 오래다. 비위 좋게 아첨하는 것을 비루하다고 하지 않고 남들과 어울려 비웃거나 꾸짖거나 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습속(習俗)이 날로 그릇되고 세도(世道)가 날로 저속해지면서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과 나라의 애통스러운 형편은 더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말이 이것에까지 미치니 어떻게 가슴이 쓰리고 머리가 아프지 않겠는가?

세상에서 경하게 여기든 중하게 여기든 나라의 법과 규율은 엄연히 존재하니, 우레나 번개와 같이 엄한 형벌을 가해서 도끼나 작두로써 다스릴 방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선 모두 함께 고쳐나가자는 뜻에서 이렇게 마음을 털어놓고 자세히 타이르는 것이니(姑以咸與維新之義, 有此敷心洞諭之擧), 벼슬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스스로 노력하여 담당한 일이 있는 자는 담당한 일에 힘을 다할 것이고,

바른말을 할 책임이 있는 자는 그 책임에 힘을 다할 것이며, 지방의 감사와 수령도 모두 자기들의 직책에 힘을 다하여 임금의 은혜와 조상의 기대를 저버리는 죄를 스스로 저지르지 않도록 하라.

끝내 방자하게 굴면서 두려운 줄을 알지 못하는 자는, 훗날 죄를 뉘우쳐야 하는 때를 당하더라도 혹 내가 미리 타일러 주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

대왕대비의 엄명은 빈말이 아니었다. 대왕대비 뒤에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있었다. 대원군의 쾌도난마(快刀亂麻)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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