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5) - 무산된 삼정개혁
조선, 부패로 망하다 (5) - 무산된 삼정개혁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0.12.14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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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5월 22일에 진주 안핵사 박규수가 민란의 원인이 삼정문란에 있으며 특히 환곡이 제일 문제라고 아뢰었다.

고산서원(장성군 소재. 기정진을 모신 서원)
고산서원(장성군 소재. 기정진을 모신 서원)

이러자 5월25일에 철종은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삼정개혁안을 마련하라고 명했다. 이리하여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 삼정 개혁을 위한 특별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총재관은 영부사 정원용, 판부사 김흥근·김좌근, 좌의정 조두순이었고, 실무를 총지휘하는 당상은 김병기, 김병국, 정기세·김병덕 ·김병주등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거의 대부분 세도가들이었다. 한마디로 개혁 대상에게 개혁을 맡긴 꼴이다.

6월12일에 철종은 삼정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인정전(仁政殿)에 몸소 나가서 문관·음관(蔭官)의 당상(堂上)등에게 책문(策問)을 내고 답안을 내도록 하였다.

이어서 이날 삼정의 폐단에 대해 초야의 인사(人士)들에게도 반드시 평소 가슴속에 품고 있던 계책이 내도록 각 고을에 지시하였다.

6월18일에는 여러 유현(儒賢)들에게 ‘삼정책(三政策)’을 내도록 유시하였다.

이러자 한 자리 노리는 선비들이 앞다투어 개혁안을 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개혁안은 세도가의 비리를 지탄하는 내용은 없고 하수인인 지방수령과 아전의 비리만 지적했다.

이때 장성 출신 선비 기정진(1798-1879)도 ‘임술의책(壬戌擬策)’을 만들었다. 그는 집권층의 부패가 농민항쟁의 원인이라고 통렬히 비판하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병들게 하는 이유와 나라를 좀먹게 하는 실제 내용이 정약용의 『목민심서』 안에 있다고 하면서, 임금께서 하루빨리 이 책을 읽어보고 조정에서 그대로 시행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런데 기정진이 상소문을 장성군 관아에 제출하자, 담당자가 서식이 틀렸다는 이유로 트집을 잡았다. 황당해한 기정진은 ‘임술의책’을 회수하고 아들에게 불태워버리라고 하였다. 참 황당한 세상이었다. (다행히도 아들이 보존하여 <노사문집>에 남아 있다.)

철종은 윤 8월 11일에 이정청(釐整廳)의 총재관(摠裁官)과 당상(堂上)들을 접견하여 삼정개혁안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고, 윤 8월19일에 삼정개혁안을 발표하였다. 삼정이정청이 활동한 지 4개월 만이었다.

그 요지는 이러하다.

첫째 전정에서 모든 부가세의 도결을 철폐하고 궁방전 등 지나친 도조 징수를 금한다.

둘째 군역세는 연령규정을 준수하여 16세 미만과 60세 이상의 장정에게는 거두지 못한다. 유생 또는 사대부를 사칭하여 군역을 면하려는 자를 철저히 가려낸다.

셋째 환곡은 전면적으로 폐지하고 토지 1결당 2냥씩 징수한다.

이를 분석해보면 군역세는 양반이나 유생에게는 면제되었고, 환곡은 폐지하지만 세수 부족을 위해 토지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한마디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었다. 하지만 환곡 철폐에 대하여는 농민들은 환영하였다.

그런데 조정은 시행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삼남 지방의 농민항쟁이 거의 수그러들자 ‘너무 서둘러서 개혁안을 마련하다 보니 오히려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느니 ‘환곡제도는 수백년 지켜온 법제인데 하루아침에 폐지하는 것은 고려해야 한다.’는 등 본색을 드러냈다. 삼정 개혁은 지배층의 기득권 포기였기에 지배층이 이를 포기할 리 만무하였다.

결국 10월 29일에 조정은 옛날의 규례(舊規)로 돌아간다고 태도를 바꾸어 삼정개혁안은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한마디로 조정이 백성에게 사기 친 셈이다.

10월에 다시 민란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함경도였다. 고종 시대에도 전국적으로 46개소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1894년에는 동학농민혁명으로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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