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4) - 임술농민항쟁
조선, 부패로 망하다 (4) - 임술농민항쟁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0.12.09 09:48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상도 진주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1862년 3월 26일에 성주, 4월 2일에는 선산, 4월 7일에는 개령에서 농민들이 봉기했다.

전주 경기전의 태조 이성계 영정.
전주 경기전의 태조 이성계 영정.

개령은 향반 김규진이 수탈의 폐단을 주도하자 현감 김후근이 그를 잡아 가두었다. 이에 이태복의 주도 아래 농민 수천 명이 감옥을 부수고 죄수를 탈출시키고 사람을 살상하고 환곡 장부를 불태웠다.

전라도 지역은 3월 27일에 익산에서 가장 먼저 봉기가 일어났다. 군수 박희순과 관속들이 농간을 부려 도결(都結) 2,800냥을 추가로 징수했다. 임치수·소성홍 등이 여러 번 진정하였으나 묵살당하자, 3월 27일에 3천 명이 관아로 몰려가 군수를 끌어내어 고을 밖으로 내쫓았다.

조정에서는 4월 22일에 이정현을 익산 안핵사로 파견하여 수습했는데, 5월 5일에 조정은 난을 일으킨 임치수· 소성홍 등 10명을 효수하고, 군수 박희순을 유배 보냈다.

4월 16일엔 함평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농민들이 깃발을 세우고 죽창을 휘두르며 관아를 습격, 현감 권명규를 구타하여 몰아내고 인가를 부수거나 불태웠다. 이들은 한 달 동안 자치행정을 폈다.

장흥에서는 전 군수 고제환이 주동한 1천여 명의 농민이 관아와 아전들의 집을 습격하여 불태웠다.

부안에선 5월 8일에 특이한 일이 일어났다. 호남선무사 조구하 일행이 부안 삼거리를 지날 때 농민 1천여 명이 가로막고 수탈행위의 시정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무시되자, 성난 농민들은 아전들을 밟아 죽이고 호남선무사를 쫓아보냈다.

5월 하순에는 전라병사 백희수가 이임하여 서울로 올라가면서 부안을 지나게 되었다. 그러자 모내기하던 농민들이 우르르 달려가서 행차를 막고 호위하는 비장을 끌어내 두들겨 팼다. 여자들은 가마에 타고 있는 백희수의 아내를 끌어내 머릿채를 흔들고 옷을 갈기갈기 찢었다.

이런 과격한 모습이 전라도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 봉기의 불길은 육지에선 금구·무주, 해안지역에는 장흥, 순천 등지로 번져 영남보다 거셌다.

이렇게 전라도 지역의 농민봉기가 격렬한 것은 전라감사 김시연 때문이었다. 그는 1861년에 전라감사로 부임한 이래 닥치는 대로 수탈하였다.

1862년에 농민봉기가 일어나자 그는 혼자 서울로 도망쳤다. 식구들이 뒤따라 올라가다가 그의 모친이 백성들에게 잡혔다. 백성들은 전라감사 김시연 모친의 음부를 모래로 문지르면서 “네 음부가 불결해서 탐관의 아이를 낳았구나.”라고 빈정거렸다 한다. 조정은 김시연을 제주도에 위리안치하였는데 1863년에 풀려났다. 게다가 탐관오리 김시연은 1875년(고종 12년)에는 형조판서까지 하였다. 참으로 너그러운 임금들이었다.

한편 충청도의 농민봉기는 조금 늦게 번졌다. 5월 12일에 회덕의 초군(樵軍:땔나무꾼)이 중심이 되어 항쟁을 일으켰다. 초군들은 관아로 몰려가 현감 김낙균을 욕보였으며, 부패한 아전과 부호의 집을 부수거나 불태웠다. 그뿐 아니라 청주 목으로 침입하여 탐학한 부호들의 집을 불태웠다.

5월 16일에는 공주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농민들은 읍내에 모여 시위를 벌였고, 양반 토호의 집에 방화하였다. 다음 날에는 6천 여명이 충청감영에 모였다. 충청감사 유장환은 겁을 먹고 벌벌 떨며 소원대로 다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5월 18일에는 은진에서 봉기했다. 농민들은 양반 토호 62가구의 집을 때려 부수고 불태웠다. 이후 봉기는 연산과 청주, 문의·진천 등에서도 일어났다.

경상·전라·충청지방의 농민항쟁이 심각해지자 5월25일에 철종은 삼정

개혁을 하도록 하교하였다. (철종실록 1862년 5월 25일)

"근일 삼남(三南)에서 발생한 민요(民擾)는 이것이 진실로 어떠한 변괴인가? 탐관오리가 탐학하고 간사한 향임(鄕任)과 교활한 아전들이 주구(誅求)하니, 그 실정을 따져보니 슬프다. 대저 민생과 관련하여 제거해야 할 부분은 오로지 삼정(三政)이라고 하고, 난민들이 구실로 삼고 있는 것도 오로지 삼정문란이었다. 삼정에 대해 의정부에서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강구하게 하되, 개혁할 만한 것은 개혁하고 교정(矯整)할 만한 것은 교정하여, 저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어서 울부짖는 무리들이 편안히 휴식하면서 차별없이 똑같게 여기는 은정(恩政)을 고루 입게 하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견훤왕 2023-12-19 14:07:35
이 정신을 이어받아 총선에서 윤석렬 정부와 국짐당을 처단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