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197) 제산수화(題山水畵)
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197) 제산수화(題山水畵)
  •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20.11.02 09: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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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 이렇게 사는 것도 참은 아닐지 모르겠네

우리 선현들이 그렸던 그림은 자연을 시제로 하는 작품이 주로 많았다. 기본인 사군자를 비롯해서, 산수화 한 폭은 자연에 묻혀 살고 싶다는 속 깊은 마음을 나타내는 수가 많다. 혼신의 넋을 담아 산수화 한 폭을 그리고 나면 새로운 생명체를 낳은 것 같아 즐겁기만 하단다. 마지막에 시제詩題를 쓰고 나면 더 후련하다. 온갖 화초가 그림 속에 한참 봄날에 휘드러졌는데, 필경 인생도 이같이 한 마당의 꿈일 텐데라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題山水畵(제산수화) / 괴애 김수온

산 그려 물 그려 귀신 같이 그리었네

온갖 화초 봄날에 화창하게 흐드러져

인생사 일장춘몽에 너도 나도 사는 거지.

描山描水摠如神   萬年千花各自春

묘산묘수총여신   만년천화각자춘

畢竟一場皆幻境   誰知君我亦非眞

필경일장개환경   수지군아역비진

너와 나 이렇게 사는 것도 참은 아닐지 모르겠네(題山水畵)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산과 물이 귀신과 같이 화폭에 그려있었구나 / 온갖 화초가 그림 속에 한참 봄날에 휘드러졌는데 // 필경 인생은 이같이 한 마당의 꿈일 텐데 / 너와 내가 이렇게 사는 것도 인연이겠으나 참은 아닐테지]라는 시심이다.

위 시제는 [산수화의 시제를 붙이며]로 번역된다. 시인도 제법 수묵화를 쳤던 모양이다. 사군자나 산수화 한 점을 치고 나면 마지막으로 남는 일은 화제를 붙이는 작업이다. 그림에 알맞은 시제이겠지만, 평소 시인(혹은 화가)이 좋아하는 문구를 생각하고 골라 화제는 넣는 것도 일반적인 관례다. 시인은 시제를 놓으면서 산수화와 대화하는 특수한 방법을 원용하고 있다. 시인은 [어이, 산수화 자네! 얼굴을 보니 산과 물이 마치 귀신같이 생겼네 그려. 그러나 화초를 보니 봄날이 한 창이군 그래]라는 생각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화선지에 그려진 산과 물이 마치 귀신과 같이 그려졌군, 온갖 화초가 한참 봄날에 휘두러졌다는 선경의 시상 주머니를 털어내고 만다. 산수화와 대화 나누는 특이한 시적 구성을 일구어 냈다. 중얼거리는 화자의 넋두리는 계속된다. [필경 인생은 한 마당 꿈일테니 / 저네와 내가 이렇게 사는 것도 묘한 인연이겠으나 비록 참은 아닐테지]라는 후정後情의 시적 그림에 다소 후련한 느낌까지도 주게 된다. 시적인 영상으로 화폭에 그림을 담아보려는 시인의 시상은 독특해 보이고, 감명을 준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산과 물 화폭에 그려 봄이 한창 휘들었네, 인생 한마당 꿈일래라 너와 나 큰 인연인 걸’이라는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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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1410∼1481)으로 조선초기의 문신이자 학자다. 1457년(세조 3) 중시에 뽑히어 성균사예, 중추원부사, 판중추부사,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471년 영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원각사 비명을 지었고 <금강경>을 국문으로 번역하기도 하였던 인물이다.

【한자와 어구】

描山: 산을 그리다. 描水: 물을 그리다. 摠如神: (산과 물이) 다 귀신 같다. 萬年: 만년. 오래되었다. 千花: 온갖 꽃. 各自春: 각자가 스스로 한창 봄이다. // 畢竟: 필경. 一場: 한창. 皆幻境: 다 흐드러지다. 誰知: 누가 알리. 누가 알겠는가. 君我: 그대와 나. 亦非眞: 또한 진실은 아닐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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