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 새 일본 총리가 아베 판박이는 아닐 터
스가 새 일본 총리가 아베 판박이는 아닐 터
  • 조용래(광주대 초빙교수, 전 국민일보 편집인)
  • 승인 2020.09.23 0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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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래(광주대 초빙교수/전 국민일보 편집인)
조용래(광주대 초빙교수/전 국민일보 편집인)

지난 10일 일본에서는 2012년 3월 출판된 ‘정치가의 각오’(정가 1430엔)가 아마존 저팬에서 9만9700엔에 거래됐다는 뉴스가 온라인을 달궜다. 중고 책 가격이 갑자기 수십 배나 뛰어오른 데는 이유가 있었다. 14일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압승하고 16일 일본 총리로 등극한 스가 요시히데(菅義偉)가 쓴 책이 8년이나 지나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은 것이다.

해당 출판사인 문예춘추가 10월 중 재판을 내놓겠다고 17일 밝혔지만 여전히 온라인에서는 5만 엔을 호가한다. 그간 일본 국민들은 아베 신조 내각의 실질적인 2인자로서 7년 8개월이나 내각관방장관을 맡아온 스가에 대해 총리 가능성이 있는 인물로 전혀 평가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베 전 총리의 후임은 그렇듯 전격적으로 스가로 결정됐다.

일본 정치에서 관방장관을 역임하고 총리가 된 이가 적지 않음을 감안하면 스가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은 의외다. 파벌정치가 뿌리 깊은 자민당 내 역학관계로 볼 때 스가 그룹은 소속의원이 겨우 9명뿐으로 9개 파벌 중 가장 왜소하기 때문일까. 아베 전 총리가 속한 호소다파 98명, 아소파 54명 등에 비하면 스가 그룹은 거의 존재감이 없다.

게다가 스가는 아베와 같은 세습의원도 아니고 뒤늦게 48세에 중의원이 됐으니 더욱 그리 보였겠다. 자민당 소속 중의원 지역구 의원은 현재 총 218명인데 이 중 72명이 세습이다. 스가 스스로가 개천에서 용 난 인물이며 기존의 자민당 파벌정치 문법과는 전혀 다른 무파벌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배경이다. 서민 총리는 일본 유권자들의 관심을 끈다.

하지만 스가가 농사꾼의 아들에서 시작한 자수성가형 인물이라는 얘기는 사실과 좀 다르다. 최근 알려진 바로는 그의 부친은 상당한 부농이었고 지역에서도 활발한 활동가였다. 중요한 점은 스가가 겉으로 드러나 있는 자신의 정치적 한계를 어떻게 뛰어넘었는가 하는 대목이다. 과연 그 배경은 무엇일까. 치밀한 그의 현실감각이 파벌정치의 틈새를 파고 든 것인가.

‘정치가의 각오’는 ‘관료를 움직이게 하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일본 의원내각제는 오래 전부터 무능한 정치가가 유능한 관료에 휘둘린다며 ‘관료내각제’로 부르는 게 더 낫겠다는 야유가 있었다. 이에 여야 할 것 없이 내각이 관료를 잘 부리도록 하는 게 정치개혁의 하나라고 봤다. 아베 전 총리도 총리에 도전하기 전부터 주장했다. 스가가 책에서 그것을 콕 짚은 이유다.

중의원 진입 후 이해관계를 좇아 자주 파벌을 옮겨온 스가는 2006년 아베의 총재 도전과정에서 아베를 적극 지지했고, 그 결과 1차 아베 내각에서 총무상이 된다. 이후 2012년 아베의 재등장이 거론될 즈음 선제적으로 ‘정치가의 각오’를 자비 출판했다. 아베 전 총리가 그해 12월 총리로 복귀한 후 재임 기간 내내 스가를 관방장관으로 중용한 배경이다.

스가 총리는 취임 기자회견에서 아베 정권 계승을 천명했다. 그렇다면 정치인 스가는 아베의 판박이로만 남을 것인가. 그건 아닐 터다.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아베 전 총리는 지나칠 정도로 이념 지향적이나 스가는 그간의 정치행보를 볼 때 그때그때 현실을 추구하는 인물에 가깝다. 관방장관 재임 중에도 내각의 관리자로서 아베의 주장에 발맞춰 맡은 역할에만 충실했다.

아베의 이념은 대국주의다. 패전국의 낙인을 지워내고 미국과 더불어 냉전에서의 승전국임을 앞세워 일본의 위상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그 연속선상에서 평화헌법 개정을 필생의 목표로 삼았다. 반면 스가는 대북 강경론, 반한 주장 등을 펴온 우파 입장인 것은 분명하나 이념 지향적이지 않다. 그의 공식 인터넷 홈페이지에도 자민당이 그간 추진해온 정책에 대한 소개가 있을 뿐 특정 가치나 이념을 표방하거나 지향하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또 하나는 아베의 사임 배경이다. 겉으로는 고질인 궤양성 대장염 재발을 말하나 실제로는 아베 정권이 국민의 신뢰를 잃은 탓이 크다. 선거에서 거푸 승리해 다수당 지위는 유지했으나 경제정책인 아베노믹스는 지리멸렬이고, 꽃길로 준비했던 도쿄 올림픽은 코로나19 탓에 1년 연기된 채 내년 개최조차 불분명하다. 무엇보다 재임 내내 잦은 스캔들로 지지율은 최악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베 정권 계승이 스가 정권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물론 파벌정치의 속성 상 아베는 당분간만 스가에게 정권을 맡기겠다는 의도가 있을지 모른다. 이른바 아베의 상왕 체제다. 하지만 이미 기울어진 아베의 역할은 그리 오래가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이후 일본의 국내외 정책은 스가의 현실주의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일본 국민 입장에서는 새 정권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목표와 방향이 보이지 않는다고 우울해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꼬일 대로 꼬인 한·일 관계를 감안하면 스가 정권의 등장으로 적어도 새로운 변화 가능성은 열린 것으로 보인다. 그간 아베 정권이 애써 한국을 배제하려고 했던 움직임도 시나브로 재조정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과 스가 총리가 덕담 가득한 축하서신과 전향적인 감사회신을 주고받은 것도 고무적이다. 한국 정부가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 모색에 적극적으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겠다. 지금은 한·일 관계에서 최선을 기대하기보다 서로가 최악을 피해야 할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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