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187) 심곡(深谷)
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187) 심곡(深谷)
  •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20.08.24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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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달, 맑은 바람에 푸른 냇물 희롱하네

널리 알려진 고승께서는 깊은 계곡을 찾아 가슴에 맺힌 심회를 풀어보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범인들도 사람 발길이 닿지 않았던 깊은 그곳에 가면 무서움증이 드는가 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상이 쏟아질 것만 같거늘. 심곡深谷엔 누구나 갈 수 없는 곳인데 그 곳을 누가 갈 수 있을 것인가를 심회하기도 했으렸다. 심곡 안은 뛰어난 경치를 알고 있는 사람이야 별로 없고, 밝은 달 맑은 바람에 푸른 냇물 희롱했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深谷(심곡) / 나옹선사 원혜

먼 곳에 누가 능히 그 곳에 갈 것인가

조각구름 동구 밖에 문 앞에 결려있고

경치에 아는 자 없고 명월청풍 희롱하네.

極遠誰能到那邊   片雲橫掛洞門前

극원수능도나변   편운횡괘동문전

其中勝境無人識   明月淸風弄碧川

기중승경무인식   명월청풍롱벽천

밝은 달, 맑은 바람에 푸른 냇물 희롱하네(深谷)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나옹선사(懶翁禪師) 원혜(元慧:1320~1376)로 고려말의 고승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아득히 멀어 누가 그곳까지 갈 수 있을까 / 조각구름이 동구 밖 문 앞에 걸려있어라 // 그 안의 뛰어난 경치를 아는 사람이야 없고 / 밝은 달 맑은 바람에 푸른 냇물만 희롱한다네]라는 시심이다.

위 시제는 [깊은 계곡에서]로 번역된다. 깊은 계곡에 들어가면 방향감각을 잃은 수가 많다. 동과 서로 산이 가려 해가 늦게 뜨거나 빠르게 지는 깊은 산중에 마을이 있고 더 깊은 곳에 들어가면 깊은 계곡인 심곡深谷이 있다. 일반적인 지형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다. 심곡에는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깊은 곳이다. 시인은 이런 심곡에 들어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깊은 계곡에 심취해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심곡은 아득히 멀어 누가 능히 그곳까지 갈 수가 있을까를 물으면서, 조각구름 동구 밖 문 앞에 걸려있다는 시상을 떠올리고 있다. 멀리서 바라본 조각구름은 저 앞에 전개되는 동구 밖 문 앞에 우뚝하게 걸려 있음을 상상해 냈다. 화자는 심곡의 경치일망정 이곳을 자주 찾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누가 감히 찾아 올 수 있겠는가라고 물으려 한다. 그 안의 뛰어난 경치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고, 밝은 달과 맑은 바람만이 푸른 냇물을 희롱한다는 시상 주머니를 털어내고 만다. 밝은 달과 맑은 바람이 푸른 냇물을 희롱한다는 것은 푸른 강물의 유일한 벗은 밝은 달과 맑은 바람이라는 생각을 이렇게 표현했겠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누가 그곳 갈 수 있나 조각구름 동구 밖에, 좋은 경치 알지 못해 명월청품 희롱하네’라는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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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나옹선사(懶翁禪師) 원혜(元慧:1320∼1376)로 고려 후기의 승려이다. 지공, 무학과 함께 삼대화상이라 일컬어졌다. 중국 서천의 지공화상을 따라 심법의 정맥을 이어 받았다. 전국을 돌다가 1344년(충혜왕 5)부터 회암산에서 4년 동안 좌선하여 비로소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자와 어구】

極遠: 아득히 멀다. 誰: 누가. 能到: 도달할 수 있다. 那邊: 이 곳. 片雲: 조각 구름. 橫掛: 빗기어 걸리다. 洞門前: 동구 밖 문 앞. // 其中: 그 안에. 勝境: 뛰어난 경치. 無人識: 아는 사람이 없다. 明月: 밝은 달. 淸風: 맑은 바람. 弄: 희롱하다. 碧川: 푸른 시내. 곧 푸른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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