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바람
나무와 바람
  • 문틈 시인
  • 승인 2020.05.26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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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가 하는 일이라곤 집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하릴없이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를 되돌아보고 후회한다. 매일 이런 식으로 귀한 하루를 다 보낸다. 공자가 일일삼성이라고 했는데 나는 한번 반성에도 부친다.

금싸라기 같은 하루를 너무 허투루 보내는 것 같아 스스로에게 죄책감이 든다. 무엇인가 날마다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데서 오는 후회다. 그렇다고 내게 긴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쓰다 만 원고는 언제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른다. 쓰려는 마음이 동해야 이어갈 텐데 어쩐 일인지 그럴 마음이 아니다. 글이란 것은 억지로 쓴다고 될 일이 아니다. 무엇인가 쓰려는 충동이 마음속에서 넘쳐야 쓰여진다.

나는 오늘 별다른 글감도 없고 해서 글 쓰는 것은 미루고 전부터 생각만 하고 실행하지 못했던 일을 결행하기로 했다. 그 일이란 게 누가 봐도 아주 멍청한 짓이라 용기를 내야 할 수 있을 것 같다.

베란다에 의자를 갖다 놓고 거기 앉아서 아무 생각없이 바깥을 내다보며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다. 내 생각에도 좀 생뚱맞은 짓이긴 하다.

집 앞 풍경은 이렇다. 바로 베란다 앞쪽으로는 아래 작은 운동장만한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그 뒤로 전에도 몇 번 이야기한 바대로 작은 나무숲이 있고, 그 너머로 공활한 하늘이 펼쳐져 있다.

잔디밭은 빙 둘레로 이팝나무, 벚나무 등속이 서 있다. 지금은 벚꽃은 벌써 전에 지고 요 며칠 피었던 이팝꽃도 다 져서 이제는 나무들은 잎의 계절로 가고 있다. 어디에 눈길을 두고 바라볼까 생각을 하려는 차에 이팝나무가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아무도 나무를 흔드는 존재가 없는데 나무가 마치 누가 흔들 듯 흔들린다. 순간, 그 모습이 오늘따라 참 이상하게 보였다. 바람은 나무를 흔들고 나무는 또 바람에 몸을 맡기고. 늘 있는 일이건만 마치 처음 본 모습처럼 아주 이상하게 내 눈에 보였던 것이다.

나무는 위로 뻗어간 줄기에서 나간 가늘고 긴 줄기들이 바람이 흔드는 대로 흔들린다. 흔들리는 나무의 모양을 가만 보자 하니 나무의 생김생김이 바람이 불어와서 흔들리는 것에 대비하게끔 모양을 하고 있다. 우선 나무 잎새의 디자인부터가 그렇다.

바람을 최소한으로 맞이하게끔 잎새마다 골이 져 있고 모양은 한결같이 유선형으로 되어 있다. 오늘 처음으로 그 사실을 발견한 것처럼 나는 더욱 관심을 갖고 바람이 나무를 흔드는 모양을 집중해서 바라본다.

위로 뻗어 올라간 줄기들은 낭창낭창하니 아무리 큰 바람이 불어도 꺾어지지 않게시리 모양을 하고 있다. 만일 위의 나무줄기들이 유연하지 않다면 큰 바람이 불면 견디지 못하고 다 꺾어지고 말 것이다.

나뭇잎새, 위로 뻗은 줄기, 그리고 나무 기둥의 윗부분에서 갈라져 나간 작은 줄기들, 이런 하나하나의 모양들이 바람이 불 때, 비가 올 때, 눈이 올 때를 대비해 맞춤형으로 생겨 있다. 이 모양이 참 신통방통하다.

그러니까 나무는 애초에 흙 속에서 처음 어린 싹으로 돋을 때부터 세상에 나가면 비바람 속에서 어떻게 견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나무의 세세한 모양이 그걸 말해주고 있다.

그렇게 보니 흡사 바람은 공연히 나무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무슨 뜻을 가지고 나무를 흔드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무를 흔듦으로서 나무에게 운동을 시켜주고, 나무를 튼튼하게 하고, 땅 속에서 뿌리가 빨아들인 물을 우듬지까지 올라가게 하고, 그렇지 않을까.

나뭇가지는 바람에 휘어지다가도 바람이 놓아주면 곧바로 제 자리로 돌아간다. 그러면서 나무는 자란다. 바람이 아무리 나무를 흔들어도 굵은 밑둥치는 꿈쩍 않는다. 그것도 다 이유가 있다. 밑둥치가 흔들리면 자칫 나무뿌리가 뽑혀질 수 있다. 나무의 생명이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태풍이 불 때 간혹 뿌리 뽑힌 나무들을 볼 때가 있다. 그래서 드러나지는 않는 뿌리 역할도 크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뮐 새’라고 용비어천가는 노래한다. ‘큰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린다’고 하지 않고 나무의 뿌리를 근본으로 본 것이다. 깊은 통찰이다.

나는 바람이 나무와 희롱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나무와 바람이 서로 이치에 연결되어 있음을 알았다. 집에 틀어박혀서 베란다에 앉아 이런 무료한 생각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갑자기 하늘이 시커먼 구름으로 가득해진다. 바람이 구름을 몰아오고 있다. 흔들리는 나무에게도 비가 뿌릴 듯하다. 오늘 밤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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