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 문틈 시인
  • 승인 2020.03.25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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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본 영화 중에 ‘그날이 오면’(on the beach)이라는 영화가 있다. 원제와는 다른 제목을 달고 상영되었는데 한글 제목이 훨씬 영화 내용에 맞아 보인다. 내가 본 모든 영화들 중에서 가장 인상깊은 영화로 꼽는다.

줄거리는 미국과 중국이 대만 문제를 둘러싸고 핵전쟁을 일으켜 모든 인류가 사라지고 지구는 방사능에 오염되어 그 어떤 육지 동물도 멸절하게 된다. 오직 호주 해안의 바닷 속 미국 잠수함 승조원들만이 지구상에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 그룹이다.

그 잠수함 무전수신기에 어디선가에서 발신되는 모스 신호가 들려온다. 돈돈 쯔쯔쯔 돈…. 방사능으로 인류가 사라진 지구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생명의 소리같은 모스 신호에 승무원들은 아연 반색하며 그 신호를 추적하여 항해한다.

만일 생존자들이 지구 어딘가에 남아 있다면 인류는 어떻게든 존속할 수 있으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는다. 방사능을 피하여 해저로 기나긴 항해를 떠난 잠수함은 마침내 알래스카의 어느 도시에 기항한다.

승조원들은 육중한 방호복을 껴입고 무선 신호를 따라서 도시로 한 걸음 한 걸음 찾아간다. 대도시의 빌딩과 상점들 사이로 난 텅 빈 거리들이 보여주는 적막한 장면은 원색의 공포감 바로 그것이었다. 내 뇌리 속에 각인된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가까스로 승무원들이 모스 신호가 발신되는 곳을 찾아 어느 건물에 당도했을 때 그곳에는 사람의 흔적은 없고 창틀 가까이에 놓여 있는 모스 발신기에 커튼의 줄이 걸려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무선 신호가 발신되고 있었다.

지금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엄청난 슬픔이 내 가슴을 옥죈다. 개미 새끼 한 마리의 움직임도 없는, 죽어 있는 도시의 풍경이 압도적으로 안겨주던 극단의 공포감. 그 사람들이 사라진 지구 도시의 정경 속에서 커튼 줄이 무전발신기를 건드려 하염없이 모스 신호를 보내는 섬뜩함. 승조원들은 크게 실망하고 잠수함으로 돌아와 논란을 벌인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어차피 인류가 사라진 지구에서 최후로 죽어갈 목숨이라면 가족들이 숨진 고향에 가서 죽겠다는 결정을 한다. 잠수함은 고향을 향해 마지막 항해를 다시 시작한다.

이 영화가 얼마 전부터 뇌리에서 생각나더니 요 며칠새 자주 떠오른다.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이 이 영화에서 느꼈던 공포감을 연상시켰나보다. 사진에서 본 도시 거리에는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았다. 식당에도 손님이 없다. 북적거리던 그 수많은 인파는 다 어디로 갔을까.

마스크를 한 사람들 몇이 마트에서 물건을 사들고 가는 모습이 드물게 보일 뿐이다. 지나가는 마을버스에는 두세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식당에는 손님이 없다. 공포가 온 도시를 짓누르고 있다. 신문에는 날마다 역병 확진자와 죽은 사람들이 숫자로 표시되고 바이러스는 여기저기로 퍼져나간다.

대구 경북 지역의 확진자수가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어느 정도 고삐를 잡은 것으로 보이는 듯했으나 이제 세계적 대유행이 서울 수도권으로 움직이는 양상이다. 집단 시설들이 많은 거대 도시에서는 콜센터나 도다른 교회의 확진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감염자가 수십 명 수백 명을 전염시킬 수 있다.

전철과 버스와 택시로 일파만파로 퍼져나갈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의 감염 전파 경로를 찾을 수가 없다. 동선을 추적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또 하나의 ‘신천지’ 감염이 나타나고 말았다.

그 확진자들의 얽히고설킨 복잡한 동선을 따라가는 전염 가능성이 공포와 두려움을 야기한다. 콜센터나 교회 확진자 집단의 동선이 가져올 파장은 생각만 해도 몰골이 송연하다. 이제 더는 어쩔 수 없다.

이탈리아처럼 서울과 수도권 주민의 외출 금지 조치를 해서 일단 확산을 막아야 한다. 모든 집단 시설은 일정 기간 닫아야 한다. 그리하면 서울에서는 모든 시민과 의료진과 행정조직이 힘을 합해 파상적인 전염사태를 어느 정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나는 영화 ‘그날이 오면’을 떠올리며 한편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이 도시에서, 이 나라에서, 이 세계에서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로부터 해방되는 날이 일상 회복의 ‘그날이 오면’이 될 것이라고.

다시 거리는 활기찬 사람들로 넘치고, 식당, 미용원, 극장, 옷가게, 카페, 동물병원, 온갖 상점들이 사람들로 붐비는 그날이 올 것이라고. 겁 많은 나는 두 달이 넘도록 이발소를 못가고 있다. 머리가 함부로 자란 산사람 같은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며 공포로부터의 해방의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신이시여, 돈돈돈 쯔쯔쯔 돈돈돈(S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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