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소리] 겨울 숲길에서
[시민의소리] 겨울 숲길에서
  • 문틈 시인
  • 승인 2020.01.09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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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나무들은 죄다 벌거벗은 채 깊은 겨울잠에 들어가 있다. 겨울에 나무들은 동면에 들어가지만 땅 속 뿌리들은 잠들지 않고 활동을 한다. 뿌리들은 긴 겨울 다음에 올 새봄을 준비하기 위하여 ‘지하운동’을 시작한다. 물을 찾아 뿌리를 뻗고 가까운 나무들의 뿌리와 소통을 한다. 나무 뿌리들은 겨울에도 쉴 참이 없나보다.

봄 여름 가을 온통 푸르름으로 숲을 덮던 그 무성한 잎새들을 다 떨구고 나목이 되어 서있는 모습은 할 일을 다 마치고 종요로이 하늘에 묵언 기도하는 자세처럼 경건해 보인다. 모든 것을 벗어버린 겨울 나무들의 모습에 이끌려 나도 헐벗은 경건한 한 그루 나무의 마음이 되어보려고 숲길로 들어선다.

나뭇가지들 새로 하늘이 내려와 차일처럼 걸려 있다. 오늘따라 하늘은 더없이 푸르다. 조롱길에는 지난 가을의 낙엽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내 발걸음 밑에서 부스럭거리는 낙엽 밟는 소리가 들린다. 한 걸음 디딜 때마다 갈잎 향기가 솟아나 안개처럼 공기 중에 퍼진다.

지난 계절에 숲은 어둡고 깊은 속에 무엇인가 비밀스런 것을 숨기고 있었다. 막상 겨울이 와서 벌거숭이로 드러난 나무들의 모습을 보니 숲에는 휑하니 아무것도 없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숲 속에 있었던 캄캄한 비밀은 다 어디로 빠져 나가고 흔적조차 없다. 마치 새들이 버리고 떠난 빈 둥지를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나무들의 맨몸은 구부러지고, 기울어지고, 갈라지고, 꺾어진 모습들을 하고 있다. 겨울이 와서야 목격하게 된 나무들의 헐벗은 모습이다. 나무들은 비바람, 태풍을 이겨내느라 많이도 힘겨웠나보다. 그 빈 나무들 사이로 못보던 작은 새들이 날아다닌다.

쓰읍, 쓰읍, 새들이 내는 소리가 숲의 적막을 잠깐씩 흐트러놓는다. 바람이 우듬지를 흔든다. 요 쬐그만 새들은 고즈넉한 빈숲에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 나와 같은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나무들은 봄에 잎을 틔우고 여름에 열매를 맺고 가을에 낙엽지고 한해를 마감한다. 해마다 이 일을 반복한다. 올 한해도 그럴 것이다. 이것은 정말 알 수 없는 신비다. 조롱길을 걸으면서 대체 이 모든 되풀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구해본다.

새잎, 푸르름, 열매, 낙엽으로 바뀌는 이 거대한 연쇄의 이치를 어찌 내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보냐. 그렇지만 나는 정말 알고 싶다. 떨어진 갈잎은 흙으로 돌아가고 나무는 봄에 새잎을 내고 다시 나무의 계절을 시작한다.

끊임없이 반복하는 이 이치에는 정녕코 무슨 까닭이 있으리라. 모르긴 해도 우주를 움직이는 어떤 미지의 거대한 의지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궁극의 원리를 내가 알 수만 있다면 나의 이 생이 헛되지 않을 것을.

모든 것은 변한다. 너도 나도 변한다. 변한다고 한탄할 일이 아니다. 나고 죽는 것은 변함의 질서에 안겨 있다. 나도 그 변화의 질서에 따라 나이 들어간다. 숲길에서 나는 내가 너무나 세상 것들을 모른다는 것을 고백한다.

옛날에 탄허 큰스님이 내게 말해주었다. ‘모든 것은 인연따라 생겨났다가 멸한다’고. 그러면서 나를 측은히 바라보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내가 여기 살아 있는 것, 내가 알지 못할 인연을 얻어 존재한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오묘하기까지 하다.

탄허 큰스님은 또 말했다. ‘어떤 사람이 봄을 찾아 멀리 떠났는데 돌아와 보니 봄은 이미 자기 집 마당 매화나무에 와 있더라’고. 나는 아둔하여 그런 선문답을 이해할 수 없다. 이 세상에 내가 온 인연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인연이 끊어진 자리, 즉 시공이 끊어진 자리가 열반이라는데, 그 열반으로 가야 한다고 큰스님은 설했다. 아직도 나는 생각중이다. 내가 모르는 것들을 생각하고 생각한다.

숲길엔 오르막길이 있고 내리막길이 있다. 숲이 푸르름에 가려져 있을 때는 밖에서 보이지 않던 길의 흐름이다. 모든 길의 시작과 끝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숲길 저 멀리 아파트 단지에 저녁 불빛들이 하나 둘 켜지고 있다. 마치 하늘의 저녁 별들에 불이 켜지는 것처럼. 나는 텅 빈 고요의 저녁 숲길에서 한 그루 나목처럼 서있다.

지금 내가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있는 것 같은 이 느낌이 어쩐지 나를 위로하는 것만 같다. 새해는 나를 위로하면서 나무처럼 살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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