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각시의 장수 비결
연필각시의 장수 비결
  • 문틈 시인
  • 승인 2019.11.20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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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올해 구순이 넘으셨다. 우리 나이로 92세시다. 듣는 것이 좀 불편한 것 말고는 건강한 편이다. 삼시세끼 식사도 잘 하고 잠도 잘 주무신다.

특별히 어디 아픈 데도 없다. 어머니께서 특별히 건강을 위해 부러 무슨 운동을 한다든지 좋다는 약이나 음식을 구해 드시지도 않으셨다.

일평생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생이란 고생은 필설로 다 못할 만큼 많이 겪으셨다. 그런 시난고난의 삶을 겪고도 장수하시는 걸 보면 수복이란 하늘이 따로 내린 복이 아닌가 한다. 하루 한번 산보를 나가시는 것 말고는 장수 비결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있다면 한시도 가만 못 있으시다는 것.

작은 아파트에 혼자 사시는데 매일 밥, 빨래, 청소를 손수 다 하신다. 밥은 매 끼기마다 지어 드신다. 전기밥솥에 몇인 분 미리 해놓고 드셨으면 조금은 편할 법도 한데 그러면 밥맛이 없다시며 끼니 때마다 새로 해 잡수신다.

정히 할 일이 없으면 돋보기안경을 쓰고 한석봉 천자문을 펴놓고 베껴 쓰신다. “쓰고 나면 금방 잊어분다, 잉.” 그래도 멍하니 있는 것보다는 한 자라도 쓰는 것이 더 낫다고 하신다.

아무것도 않고 가만있어도, 무엇인가를 해도 하루는 가는데 기왕이면 한 자라도 알려고 시간을 쓰신다는 태도다. 칼로 연필을 깎아 쓰고 뭉뚱그려지면 종이에 연필을 비스듬히 갈기도 한다. 자칭 연필각시다.

그렇게 천자문을 베껴 쓴 노트가 일백 권을 훌쩍 넘는다. 모르긴 해도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당신의 마음이고 육신이고를 하나도 안 남기고 다 써버릴 작정이신가 보다. 촛농까지도 남김없이 태우고 사위는 촛불처럼.

예로부터 장수를 사람의 복 중에 으뜸으로 친다. 옛날 시집 갈 때 신부들이 살림으로 해가는 베갯모에는 수로 놓은 수복(壽福)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장수는 모든 사람의 소망이다. 일평생 베고 잠자는 베개에다 새겨둘 만큼.

인생을 ‘짧고 굵게’ 살라고 멋진 말로 표현하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인생에서 승리는 살아남는 것이 아닐까 한다. 어머니는 내 식으로 말하면 승리자다. 구십도 넘으셨으니 이제는 세상고락 다 잊고 편안히 살 법도 하신데 늘 자식들 걱정이다.

‘전립선에는 발목 복숭아뼈 밑을 손가락으로 세게 눌러주면 좋다고 하더라.’ 텔레비전에 나온 의사가 해준 팁을 잊지 않고 있다가 전해주신다. ‘굵은 천일염으로 머리를 감으면 머리가 새로 난다고 하더라.’

몇 해 전에는 손주들이 결혼해서 아이들을 낳았다. 어머니는 생전에 장하게도 증조할머니가 되셨다. 명절 때는 자손들이 다 모여 집안이 시끌벅적하다. 그때 어머니 얼굴에 가득히 잔물결 같은 미소가 떠나지 않는 모습은 아닌 말로 ‘위대한 모상’으로 보였다.

그런 점에서 어머니는 복을 참 많이 받으신 것 같다. 어머니는 스스로 ‘내가 이렇게 오래 살 줄 몰랐어야.’ 하신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이 이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보면 극한 직업 같은 인생을 버티며 살아온 어머니에 대해 절로 경의를 표하게 된다.

나는 이 생전 조금이지만 이런저런 책들을 읽었다. 한데 내가 읽은 그 모든 책들을 한 줄로 요약한다면 어머니가 내게 해주신 말씀으로 대신할 수 있다고 감히 나는 생각한다.

언젠가 내가 어머니께 묻기를 오래 살으셨는데 인생을 무엇이라고 하시겠느냐는 객적은 질문을 했더니 “못배운 내가 인생을 무엇이라고 하겄냐. 그저 살아 있으니까 사는 것이제.”하셨다.

나는 그 대답에 한 소식을 들은 것 같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인생은 살아 있으니 사는 것이다. 태어났으니 살아보는 것이다. 그것 말고 인생에 대해서 무슨 더할 말이 있을까. 구십이 넘도록 갖은 고생을 다하시고 나서 마치도 산중 절간의 노스님이 정진 끝에 내놓은 득도(得道)의 말씀 같기도 한 그 한마디 말씀이 내게는 그 이상의 답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깨우침으로 들렸다.

어머니는 무한 긍정 마인드로 인생을 살아오셨다. 힘든 곤란이 닥쳤을 때도, 위기가 닥쳤을 때도 어머니는 결코 굴하지 않으셨다. 살아있으니까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 어머니의 삶이었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폭 하면 돼야.” 돈을 잃으면 누구한테 적선한 폭 하고, 넘어져 다치면 그 정도로 다행이라고 여기라는 것이다. 이런 어머니에게 어찌 하늘의 돌봄이 없으랴. 폭 하는 것이 어머니의 인생살이의 셈법이다.

폭 하는 데 어머니 장수 인생의 또 다른 그 무엇이 있는 것만 같다. 어머니 생신을 맞아 무슨 선물을 받고 싶으신지 사전 청문을 드렸더니 “구십 넘은 내가 무엇이 필요하겄냐. 네가 건강하면 그것이 진짜 선물이어야.”고 하신다.

나는 오늘도 안부 전화를 한다. “어머니, 어디 아프신데는 없으세요? 잠은 잘 주무셨어요?” “내 걱정은 말어야. 니가 건강하면 내가 편안하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의 인생은 거룩하고 지혜롭다. 어머니 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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