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는 망국의 지름길 - 3회 정약용, 人災(인재)를 한탄하다.
부패는 망국의 지름길 - 3회 정약용, 人災(인재)를 한탄하다.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 승인 2019.09.09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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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5년에 정약용(1762∽1836)은 흑산도에서 유배중인 둘째 형 정약전(1758∽1816)에게 편지를 보낸다. 편지에서 정약용은 이렇게 한탄한다.

“세상은 썩어 버린 지 이미 오래입니다.... 우리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있는 게 지금보다 더 심할 수 있겠습니까? 오호, 슬프기만 합니다.”

1800년 6월28일에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11살에 즉위하자 영조의 계비 정순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1801년 1월10일에 정순대비는 사학(邪學, 천주교)의 엄금하여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났다. 실은 집권세력 노론 벽파의 남인과 소론 시파에 대한 숙청이었다.

2월 8일 새벽에 정약용은 옥에 갇혔다. 그는 문초를 받고 19일 만에 풀려나서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현, 정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귀양을 갔다. 정약용의 셋째 형 정약종과 매형 이승훈은 이미 순교하였다.

그런데 9월 15일에 ‘황사영 백서 사건’이 또 터졌다. 황사영은 맏형 정약현의 사위였다. 정약용과 정약전은 다시 끌려 왔다. 그리하여 국문을 받았다. 혐의가 없어 목숨은 건졌지만, 다시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갔다. 1801년 11월22일에 두 사람은 나주에서 헤어졌다.

1801년 11월 하순에 정약용은 강진읍 주막집 노파가 내 준 방에서 기거했다. 1802년 초봄에 정약용은 아전의 자식 황상, 손병조 등 4명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1803년 겨울에 정약용은 주막집 방을 ‘사의재(四宜齋)’라고 이름 지었다. ‘생각과 용모와 말과 몸가짐’ 네 가지를 흐트러짐 없이 한다는 뜻이다.
이후 정약용은 1805년 겨울에 백련사 주지 혜장선사의 도움을 받아 보은산방으로 거처를 옮겼고, 1806년 가을에는 이청(李晴)의 집에서 지냈으며, 1808년 봄에 윤단(尹慱)의 초당인 다산초당으로 옮겼다. 이 때 부터 정약용은 호를 다산이라 했다.

다산초당

한편 1809년과 1810년 연이어서 전라도 지역은 흉년이 들었다. 백성들이 굶주리고 큰 소요가 일어났다. 아낙들은 쑥과 죽으로 끼니를 때웠고, 유랑민들이 길을 메웠고, 버려진 아이들이 길거리에 즐비했다. 

이런데도 탐관오리들은 사태를 수습할 생각은 전혀 안하고, 탐학만 일삼았다. 정약용으로서는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평소에 아는 승지 김이재에게 편지를 보내 실정을 알렸다.

편지의 대강은 이렇다.

“지금 호남 일로(一路)에 근심스러운 일이 두 가지 있으니, 그 하나는 백성들의 소요이고, 또 하나는 관리의 탐학입니다. 무주ㆍ장수 사이에는 풀밭에서 노숙하는 자가 산골짜기에 가득하고 순창ㆍ동복 사이에는 유민(流民)이 길을 메웠으며, 연해(沿海)의 여러 마을에는 촌락이 텅 비어 있으니, 한마디로 흉흉합니다.

이러한데도 수령들은 전혀 들으려 하지 않고 감사(監司)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백성들이 두려워 근심하고 있는데도 안위(安慰)하지 않고 일로(一路)가 소요한데도 진무(鎭撫)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탐학과 악행을 할 뿐입니다.”

이 즈음에 정약용은 흉년에 삶이 파탄 난 백성들의 아픔을 탄식하는 시 6편을 썼다. 채호(釆蒿), 발묘(拔苗), 교맥(蕎麥), 오거(熬麮), 시랑(豺狼), 유아(有兒)가 그것이다.

이중 유아(有兒)라는 시는, 지아비는 아내를 버리고 어미는 자식을 버렸다. 여아가 자기 동생을 데리고 길거리를 방황하면서 엄마를 잃어버렸다고 엉엉 울고 있었다.

짝지어 다니는 두 아이
한 애는 쌍상투, 한 애는 묶은 머리
쌍상투 아이는 겨우 말 배우고
묶은 머리 아이는 머리만 더벅더벅
어미 잃고 울면서
저 갈림길에 있네.

붙들고 까닭 물었더니
목이 메어 더듬는 말이
아버지는 집 떠나고
어머니는 짝 잃은 새가 되었는데
쌀독이 바닥나서
사흘을 굶고서는
엄마는 우리와 함께 울었어요.

(중략)

시장에 데려가서는
엿도 사서 먹이고는
길 너머로 데려와서
아이 껴안고 재웠다오.

애는 깊이 잠이 들고
나도 죽은 듯 잠들었다가
잠을 깨고 살펴보니
엄마가 사라지고 없었어요.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뭇 새들도 집 찾아드는데
떠도는 이 두 아이들
찾아들 집이 없네.

불쌍한 이 백성들이
천륜마저 다 잃었는지
부부 사이도 사랑을 못하고
어미도 제 자식 사랑 않고


1) 정약용은 4남1녀 중 넷째이다. 이복형 정약현이 맏형이고, 모친 윤씨에게서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그리고 누이가 태어났다. 누이의 남편이 이승훈이고, 정약현의 사위가 황사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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