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고 온 작은 바다
두고 온 작은 바다
  • 문틈 시인
  • 승인 2019.07.24 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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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주 오래 전 먼 곳, 나만이 아는 곳에 작은 바다를 숨겨놓았다. 그 바다는 해송과 잡목림이 우거진 해변가 숲으로 가려진 외딴 섬에 있다. 그 작은 바다는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빈 목선 두세 척이 긴 밧줄로 매여 해안에서 물결 따라 출렁거리고 있을 뿐 그 바다는 늘 적막하다. 푸른 파도만이 하늘 끝 먼 데서 달려와 바닷가에 희게 부서진다. 수천 년 수만 년 파도들이 굴러와서 둥글게 둥글게 만들어놓은 갯돌들이 바닷가를 따라 길게 깔려 있다.

한 마장이 채 되지 않는 바닷가에는 보는 이가 없어도 연이어 크고 작은 파도를 굴리고 굴려 이 갯돌로 뒤덮인 바닷가에 부려놓는다. 흰 물머리를 치켜들고 달려오는 파도 조각들은 마치도 덕석을 말듯이 돌돌돌 구비져 갯돌 위에까지 올라왔다가 미끄럼을 타듯 일제히 내려간다.

그때, 파도가 거대한 활처럼 휜 해안으로 수수만만의 갯돌들을 하나하나 건드리고 내려갈 때 자아내는 웅장한 소리는 숨이 넘어갈 정도로 온몸을 떨리게 한다. 파도들이 무수한 갯돌들과 합주하여 내는 소리는 지구가 손을 꺼내들어 한꺼번에 거대한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듯한 웅장한 화음을 낸다.

작은 바다가 자아내는 그 바닷소리는 마치 지구에 영혼이 있어 내는 소리 같기도 하다. 해종일 바닷소리를 듣다가 스러져도 더 바랄 것이 없을 것만 같은 내가 숨겨놓은 바다의 풍경은 언제나 그렇게 거기 있다.

나는 마치 영혼의 고향에 돌아온 듯 해안의 풍경 속으로 녹아든다. 낡은 목선 두어 척이 긴 밧줄에 매여 바다 위에 떠 있다. 하루 종일 나는 바닷가 갯돌밭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하늘과 맞닿아 보이는 수평선 너머에서 파도가 나를 향해 줄달음쳐 왔다.

그것은 내게 무엇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끝끝내 알아내지 못한 생에 대한 모든 것의 답을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내가 거기 있음으로 종당엔 그 풍경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해풍이 불어와 내 머리칼을 날린다. 나는 인간세상의 언어를 잃고, 사무사(思無邪)한 상태에서 깊은 침묵의 바닥에 내려가 있었다. 대체 내가 바다에 와서 무슨 할 말이 있으랴.

파도가 왔다가 스러지고, 또 뒤이어 파도가 왔다가는 스러지고, 바다의 혀가 바다 기슭을 핥는 것을 바라보다가 바다의 끊임없는 설복에 나는 마침내 바다와 한 몸이 되어버렸다. 마치 바다가 그리워 바다에 몸을 맡긴 소금인형처럼 바다와 나는 일체가 되었다. 세상의 고달픔, 슬픔, 덧없음 같은 힘겨운 것들이 다 녹아버리고 무아가 되어버렸다.

여름바다에 와서 옷을 벗고 바다에 뛰어든 소년처럼. 아주 오래 전 언제였든가 나의 선조는 바다에서 태어났던가보다. 그러기에 내 피는 바다와의 관계를 기억하고 온몸을 달아오르게 한다. 파도가 굴러올 때마다 내 온몸의 피는 파도소리를 낸다.

나는 내가 숨겨둔 바다를 보러 가긴 했지만 하루종일 내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바다는 내 마음 안의 풍경이었다. 바닷가에는 태평양이나 황해바다를 돌아 물결 따라 흘러왔을 먼 섬 나라의 야자열매 껍질이며, 비닐봉지들이며, 그리고 누군가 이 바다에 와서 버리고 간 슬리퍼 짝들이 흩어져 있다.

누군가, 어디선가, 어느 나라에선가, 사람들이 버린 생활의 잔해들이 세계의 온 바다를 돌고 돌아 이 외진 구석 작은 바다에까지 떠 흘러 온 것들을 보노라니 나도 바다를 타고 망망한 바다를 떠서 헤매고 싶어진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 바다를 헤매야 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 것이다. 아니, 세계의 먼 바다의 기슭에 이르기 위하여, 바다와 한 몸임을 깨닫기 위하여, 바다를 떠돌아야 한다는 생각.

이 세상에서 바다를 최초로 목격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누군가, 맨 처음 바다를 본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상어떼처럼 머리를 쳐들고 자맥질하는 푸른 바다의 파도를 처음으로 보고 경악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작은 바다를 외딴 섬에 두고 돌아올 때 바다는 적막 그대로였다. 나는 하루종일 꿈속에 있다가 깨어난 사람 같았다. 나는 마치 사람들이 북적대는 도회로 스며드는 한 조각 파도 같은 느낌으로 생활의 도시로 섞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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