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서 잃어버린 것
집안에서 잃어버린 것
  • 문틈 시인
  • 승인 2019.05.28 08: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느 날 문득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로 날마다 마음이 허전하고, 약간은 불안하기까지 했다. 곰곰 생각다가 필시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무엇인가를 잃어버렸다는 느낌만은 점점 더 강하게 들었다.

나는 잃어버린 그 무엇이 분명 집안 어디엔가 있다는 확신을 갖고 이 방 저 방, 부엌, 옷장, 그리고 화장실까지 구석구석 다 뒤지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찾아내면 ‘바로 이것이다’하고 필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뜻하지 않는 곳에서 옛날에 내가 소중하게 사용하던 어떤 물건을 발견하였을 때 ‘맞아, 내가 여태 이걸 잊어버린 줄도 모르고 지냈구나’ 그런 반가운 깨달음을 얻을 때처럼. 나는 먼저 서재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책들이 꽤 많아서 다 뒤져보려면 엄청 품이 들 것 같았다.

책을 뒤지면서 책마다 나와 얽힌 사연이 떠올랐다. 아주 오래된 책, 저자가 내게 사인을 하고 기증한 책, 헌 책방에서 산 책, 책장에 꽂아둔 책들이 추억을 새기며 다가왔다. 이 많은 책들 중에는 아직도 읽지 못한 책들이 꽤 있었다. 읽었지만 다시 읽고 싶은 책들도 있었다.

내가 찾는 그 무엇인가가 책들 사이에는 없었다. 처음부터 이미 그럴 줄 짐작하고 있었다. 내가 찾는 것은 책갈피에 있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다. 그렇긴 하나 무엇인가 잃어버린, 그래서 기필코 그것을 꼭 찾아야겠다는 바람과 인내심을 갖고 계속 뒤졌다.

너무 오래된 책들은 내가 책갈피를 펴들자 종이 끝이 부스러기처럼 바스라내렸다. 어느 책갈피에는 내가 젊은 날 쓴 낙서 종이 쪼가리가 끼여 있었다. 쓰였으되 ‘인간은 동심으로부터 멀어질수록 불행해진다.’ 아마도 누군가가 한 말을 베껴놓았던 것이리라.

다른 어느 책갈피에서는 20년도 더 전에 모 신문에 연재하던 글을 읽은 독자가 신문사로 보내온 엽서가 끼여 있었다. '친구들과 돌려가면서 읽었습니다. 다음 번 글엔 필자의 얼굴을 실어주세요.’하는 내용.

나는 그때 내 얼굴이 나가는 것이 싫었다. 지금도 내 글에 얼굴 나가는 것을 매우 꺼린다. 내 얼굴이 알려지고 싶지도 않고 산벼랑에 핀 꽃처럼 눈비 맞으며 아무도 모르게 살고픈 마음이다.

다음날도 하루 종일 그 무엇인가가 있을 만한 곳이 아닌 곳까지도 나는 샅샅이 찾았다. 찾든 못 찾든 그렇게 해야 훗날에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외국에 나가 살고 있는 아들의 빈 구두 박스를 열었을 때 왠지 이 안에 무엇이 있을 것만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빈 구두박스가 여러 해 동안 버려지지 않고 왜 여기, 잡동사니들을 처넣은 광에 있는 것일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없었다! 구두 사이에 쑤셔 넣었던 흰 종이뭉치들만 있을 뿐.

내가 찾는 것은 이런 식으로 있는 것일까. 대체 그것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점점 지쳐가고 마음이 옥죄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찾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생각에 시달렸다. 크고 작은 박스가 여러 개 있어서 하나하나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버리기도, 그대로 두기도 뭣한 온갖 허섭스레기들이 차 있다.

20여년 전에 뉴욕에 부모님을 모시고 관광 갔을 때 샀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입장권이 옛날의 추억을 간직한 채 바닥에 있었다. 나는 그 티켓을 집어 들고 한참 들여다 보았다. “내가 찾는 것이 너냐?”

나는 그렇게 묻고 싶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미국에 갔던 그 옛날의 일이 조그마한 티켓 한 장에서 한참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그리고 비닐봉지 안에 든 스크랩 종이들. 그 종이조각 마다에 내 글들이 인쇄되어 있다. 나는 정말 이런 스크랩이 있는 줄을 전혀 몰랐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잡지, 사보, 신문 같은데 실렸던 내 글들을 읽어보면서 그 시절의 나를 내 두 팔로 안아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대체 이 순정한 마음으로부터 지금 나는 얼마나 멀리 떠나와 있는 것인지 잠시 서글픈 생각이 엄습해왔다. 젊은 날의 가슴앓이로 잠 못들던 때 썼던 글들을 읽으면서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면 그 시절의 마음이 지어냈던 순결한 세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정하고 맑은 세계!

나는 이후로 며칠을 구석구석 더 찾았지만 결국 그 무엇인가를 찾지 못했다. 내가 무엇을 찾는 줄 모르고 찾기 시작한 줄기찬 탐색은 무위로 돌아갔지만 그러나 찾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낡고 헐거워진 삶에서 비껴 나와 초심으로 돌아가서 다가오는 시간들에게 때 묻지 않은 새 옷을 입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진정 내가 찾고 싶은 그 무엇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나는 중요한 그 무엇인가를 찾은 느낌이다.

최신 HOT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