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비시 근로정신대 동원 심선애 할머니 별세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동원 심선애 할머니 별세
  • 박용구 기자
  • 승인 2019.02.22 11: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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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수창초등학교 졸업 후 동원...“강제노동·배고픈 기억 뿐”
2차 소송 원고로 대법원 판결 기다리다 21일 별세
고 심선애 할머니
고 심선애 할머니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2차 손해배상 소송 원고로 나선 심선애(沈善愛. 1930.06.07) 할머니가 21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8세.

1930년 현재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에서 3남 6녀 중 둘째로 태어난 심선애 할머니는 1944년 3월 광주 북정공립국민학교(현 광주수창초등학교) 졸업 후, 그해 5월께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에 동원됐다.

“1944년 3월 수창초등학교 졸업 후 얼마 동안 가사 일을 돕고 있던 중이었는데, 1944년 5월경 주위로부터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도 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일본에 가게 되면 새로운 경험을 얻을 수 있고, 공부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호기심에 나도 가겠다고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광주군청에 나오라고 해서 갔더니 일일이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신체검사를 했는데, 키가 작고 더 약해 보이는 사람은 탈락시키고, 그 중에서 비교적 건강하고 체격이 좋은 아이들만 따로 선발했습니다.”

할머니는 동원 당시의 풍경을 비교적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출발에 앞서 본정통이라 불렸던 광주 시내를 한 바퀴 돌아 남광주역까지 줄을 지어 행진을 했는데, 그야말로 장관이었습니다. 일본 군인의 인솔 하에 앞에서는 나발을 불고 북도 치고, 우리는 머리에 띠를 두르고 일장기를 흔들며 갔는데, 지나가는 연도에는 우리를 환송하기 위해 나온 서석초등학교, 수창초등학교, 대성초등학교 학생들로 남광주역까지 거리를 가득 메웠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무슨 대단한 일에 나서기나 한 것처럼 그때는 속도 모르고 기분만은 좋았습니다. 광주역에서 기차를 타고 순천을 거쳐 여수에 도착했는데, 광주역에서 출발한 사람이 어렴풋이 60여명 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나고야에서의 생활을 전혀 딴 판이었다.

“맡은 일은 줄(작업도구)로 비행기 부속을 매끈하게 다듬는 일을 했는데, 일도 서툰데다 할당된 작업량을 맞추기도 바쁜데 감시까지 심해 어린 우리들이 감당하기에는 무척 힘들었습니다.

아침 식사는 된장국에 반찬이라고는 단무지 정도였고, 한 참 자랄 나이에 식사량이라고는 숟가락 하나 정도로 워낙 적은데다 그것도 없어서 서로 먹으려고 난리였습니다. 배고픈 것이 정말 가장 힘들었습니다.”

“1945년 도야마에 있는 미쓰비시 공장으로 이동을 했는데, 그곳은 나고야 보다 훨씬 산도 많고 시골이었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이 더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나중에서 공장 울타리를 넘어 주변을 돌아다니다 배고픔을 잊으려고 시래기를 주어 끓여 먹거나, 시골 남의 집에서 아직 채 익지도 않은 땡감을 주워 먹기도 하고, 그것도 안 되면 들판에 나가 꽃을 뜯어 먹기도 했습니다. 정말 배고팠던 설움은 안 겪어 본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해방 후 고향에 돌아 왔지만, 사회적 시선은 곱지 않았다.

“어릴 때 일본에 갔다 왔다는 사실을 가족한테도 절대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이야 얘기하지만, 일본 갔다 온 사람은 모두 일본군을 상대한 위안부로 취급해 왔기 때문에, 창피해 말을 할 수 없었고 항상 조심해 왔습니다.”

오랫동안(약 20년) 파킨슨병으로 투병생활을 해 온 심선애 할머니는 2014년 2월 27일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두 번째 소송 원고로 참여했다.

후생연금 탈퇴수당금 통지서
후생연금 탈퇴수당금 통지서

소송에 필요한 강제동원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일본정부에 후생연금 기록을 신청하자, 일본 후생노동성 산하 일본연금기구는 2015년 2월 같은 소송의 원고인 김재림, 심선애, 양영수 할머니에게 해방 당시 액면가인 199엔(한화 1,850원)을 후생연금 탈퇴수당금을 각각 지급해, 국민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특히, 미쓰비시 측은 극히 사소한 이유를 구실로 소장 수령을 3번이나 반려하는 등, 고의적으로 소송을 지연시켜 오다가 소송 제기 후 35개월 만에서야 첫 변론이 시작되는 곡절을 겪기도 했다. 그 사이 심 할머니는 병세가 악화돼 2015년 요양원에 입원해 지금껏 치료를 받아왔다.

2017년 8월 11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승소한 데 이어, 지난해 2018년 12월 5일 광주고등법원에서도 “피고는 원고들에게 각각 1억 원씩 배상하라”며 원고 승소했지만, 미쓰비시중공업 측의 상고로 마지막 대법원 판결 소식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유족으로는 2남 4녀가 있으며, 빈소는 광주기독병원장례식장. 발인은 23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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