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보릿국
겨울 보릿국
  • 문틈 시인
  • 승인 2019.01.01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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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경상도 사람이다. 장인어른의 고향이 강원도라고 하나 부산에서 초등학교, 고교까지 나왔으니 출생이 어디든 경상도 사람이 맞다. 어쩌다 호남 본토박이 나와 결혼을 해서 평생을 같이 하고 있다. 결혼해서 살아오는 동안 감정적으로 지역차를 느껴본 적은 거의 없다. 말투가 좀 다르고 음식이 안 맞는 부분은 조금 있다.

예를 들면 아내는 아나고회를 좋아하나 나는 저븐이 그쪽으로 잘 안간다. 반면에 아내는 처음 시댁에 왔을 때 밥상에 올라온 보릿국을 보고 이게 무엇이냐는 듯 낯설어 했다. 아내는 경상도에서는 보릿국을 먹어본 적이 없다 했다. 나는 말한다. ‘전라도에서는 밭두렁의 푸른 잎은 거의 다 먹어요.’ 많이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전혀 틀린 말도 아니다.

전라도엔 나물이 그렇게나 많다. 논에 심은 자운영도 먹는다. 뭐니 해도 전라도 전통의 겨울 음식은 보릿국이 별미다. 나는 겨울에 보릿국을 먹어야 진짜 겨울을 느낀다. 겨울이 오면 으레 어머님께 보릿잎을 주문한다. 어머님은 보릿잎 한 보따리를 냉이나물과 함께 보내오신다. 결혼 초기에는 내가 보릿국 끓이기 전담이었지만 그 후부터는 아내가 맡아왔다.

시어머니로부터 시어머니표 보릿국 끓이기를 사사해서 맛있다는 평을 받아냈으니 나름 면허를 딴 셈이다. 나보다 훨 잘 끓인다. 보릿국을 맛있게 끓일 줄 알면 이미 전라도 여자라고 할 수 있다.

보릿국을 끓이려면 눈에 덮여 있는 푸른 보릿싹을 밭에 가서 손으로 눈을 치우며 솎아 바구니에 담아온다. 겨울 추위에 아랑곳없이 보리의 어린잎은 푸른 색깔을 띠고 청청히 살아 있다. 겨울 혹한 속에서도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어엿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참 대단하고 기이한 풀이다. 푸른 기운이라고는 다 죽어 황량한 겨울 천지에 어찌 보리 홀로 푸르게 살아 있는지 생각할수록 장하고 놀랍다. 자연이 하는 일을 내 어찌 짐작할 수 있으랴.

보릿국 끓이기는 실로 간단하다. 깨끗이 씻은 보릿잎, 된장, 마늘씨, 고춧가루, 마른 멸치, 여기에 귀한 홍어애가 있으면 더할 나위 없다. 보릿국은 국물도 깊은 맛이 있지만 씹는 맛이 일품이다. 보릿잎에서 우러나오는 고소하고 착 씹히는 상큼한 맛은 두어 그릇 더 먹어야 속이 풀린다. 보릿국이 맛이 있는 것은 그것이 겨울 속의 봄을 품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참고 기다리면 봄이 온다는 맛. 어느 큰스님이 겨울 속에 봄이 있다고 가르쳐 준 것도 보리다. “지금 밭에 나가서 눈을 치우고 보릿잎을 파보시오. 푸른 봄이 꿈틀거리고 있소.” 큰스님은 함박눈이 절 마당에 내린 날 내게 그렇게 설법하셨다. 겨울 속에 봄이 있다고. 지금도 그 깊은 뜻을 다 헤아리지 못한다.

보리는 겨울에 자란다. 내 어릴 적에는 흔히 가족들이 밭에 나가 보리를 밟아주는 것이 일이었다. 겨울 추운 날씨 탓에 보리밭이 얼어 부풀어 오르거나 따뜻한 겨울날씨가 이어지면 보리가 웃자랄 수 있어 이를 막기 위해 밟아주는 것인데 이렇게 하는 것이 보리의 생장을 돕는다. 보리를 밟으면 보리 줄기 잎에 상처를 주게 되어 보리가 웃자라는 것을 다독이고 보릿잎이 여러 잎으로 움트는 것을 돕는다.

보리밟기를 할 때 생기는 상처 때문에 보리는 수분 증산이 많아져 세포액 농도가 진해지고 추위를 견디는 힘이 강해진다. 역설적으로 보리는 이렇게 밟아주어야만 힘을 얻어 잘 자라는 것이다. 이런 생태로 볼 때 보리야말로 넘어져도 밟혀도 기를 쓰고 일어나 살아가는 누대의 가난한 사람들의 구황식품으로 딱 맞는다.

옛날 쌀이 모자라서 가난한 사람들이 먹던 보리라고 해서 보릿고개라는 말이 나왔다. 그 식량이 요새 와서는 슈퍼푸드로 꼽히고 있으니 다시 한 번 자연의 깊은 뜻을 헤아려본다. 보리는 거의 약용식품으로 취급될 정도로 효용가치가 높다. 스웨덴에서 실험한 바에 의하면 사흘만 보리를 먹어도 건강이 좋아진다고 한다. 보리는 장내의 유익한 박테리아를 증가시키고 혈당을 조절하고 체내의 활성산소를 없애줘 노화방지까지 해준다. 체온조절, 숙취해소에도 좋다.

그런 보리를 요새 사람들은 입에 까실까실하다고 썩 달가워하지 않는다. 보리밥이 몸에 두루 좋다니 보릿국에도 필시 무슨 좋은 성분이 있을 듯하다. 올 겨울에도 내 밥상엔 푸른 보릿국이 빠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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