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더디지만 꾸준히 나아가는 것
진보는 더디지만 꾸준히 나아가는 것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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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대 길레이 기고-⑤

광주에 살고 있는 나는, 현실에 두 눈 꼭 감은 채 치열한 경쟁사회에 몸담아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 헌데 요즘 들어 문득, 민주당 경선과정에 몰두해 있는 내 주변의 모습들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곤 한다. 지역주의에 기반한 사고방식으로 젖어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한 소년이 자라서 어른이 되기까지 어떤 힘들이 작용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어린 시절, 롯데제과의 아이스크림을 집어들었을 때, 아버지는 해태제과의 아이스크림을 강요하셨고, 거기서 나는 세상이 '해태'와 '롯데'로 나뉘어 있다는 것을 배웠다.
중·고등학생 시절, 선거철이었던가.

'김대중 선생님'에 관한 다소간 영웅적인 이야기로 열변을 토하시던 학교 선생님의 음성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전라도인으로서 푸대접을 받았던 울분. 그위에 얹어졌던 '그 분'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모험담이자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매개체였다. 넋 놓고 이야기를 경청하는 동안 자연스레 우리는 이 지역의 '한의 정서'를 그렇게 하나씩 익혀왔던 것이다. 이후 이러한 문화적, 경제적 낙후에 따른 소외감이 분노가 됐고, 특정후보를 통해 분출되어지면서 그것이 진보이며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암묵적 강요'가 나를 사로잡았다.

이어지는 정치권 경선 소식으로 세상이 시끌벅적하다. '노풍'이라 불리우는 새로운 바람이 5·18로 '진보'의 이름을 얻은 광주에서 보란듯이 '진보의 풍차'를 돌리고 있다. 그 풍차를 가리켜 '급진적', '좌파적'이라며 돌진하는 돈키호테들도 있지만, '새로운 대안'으로 반기는 사람도 있고, 어떤 이들은 '비판적 지지'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진보'라는 단어의 남용과 '비판적 지지'의 위험성을 경험한 적 있는 우리들로서는 선뜻 어느 쪽으로든 나서기가 꺼려진다.

과거 DJ를 진보적이라고 믿으며 5·18의 한을 풀어줄 것으로 기대했던 시민들은 요즘 답답해 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리라. 당장 청년실업이라는 그물에서 허우적거리는 우리 또래 역시 부정부패와 대량해고, 인권침해라는 현실 속에서 감내해야 할 인내의 무게가 버겁기만 하다.

한때 '선생님'으로 불리며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사람이 사실 의식은 '보수적'이었고, 단지 군부독재 시절 투사의 이미지가 굴절된 것뿐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동서화합'을 외치는 '노풍'이 불고 있지만, 이 역시 사실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임에도 기형적인 정치현실 때문에 그의 주장이 '진보'라고 비치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그를 '진보'라고 믿고 싶어하는 우리의 현실이 씁쓸할 뿐이다.

냉혹한 이분법적인 사고, 배려나 존경보다는 경쟁과 따돌림이 판치는 세상 속에서 타인의 불행을 보고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내 자신 역시 '공범자'의 오명을 벗기 힘들 것이다. 더군다나 '선거'를 통해 '속죄의식'을 거행하기에는 과거의 경험이 발목을 붙잡는다. 하지만 진보가 그리 거창한 담론이나 정치적 선택에 있지 않고 일상 속에서 느리지만 꾸준히 나아간다는 믿음이 다시금 나를 '비판적 대안'으로 기울게 한다. 어느 선배가 말했던 "올해도 선거일에는 소풍이나 가야겠다."라는 말이 여전히 매혹적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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