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12)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상트페테르부르크(12)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 승인 2018.11.12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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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루벤스(1577~1640)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에서 성모 마리아를 실신한 것으로 그리지 않고 왜 의연하게 그렸을까? 이는 반종교개혁과 관련이 있다.

1517년 10월 31일 수도사이며 신학교수인 마르틴 루터(1483~1546)는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 성(城)교회 정문에 면죄부 판매를 항의하는 ‘95개조의 논제’를 붙였다.1)

수도사 테첼은 면죄부를 팔면서 연옥에 있는 영혼을 구해준다고 약속했다. 면죄부 판매 대금은 성 베드로 성당 건축자금이었는데, 이는 로마 교황청의 타락과 부패의 전형이었다.

루터는 ‘95개조의 논제’ 중 제36조에서 “진정으로 참회하는 모든 사람은 면죄부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에도 그리스도로부터 자신의 죄를 사면 받을 권한을 가진다.”라고 주장하며 면죄부 판매에 정면 도전했다.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긴 것이다. 루터의 반박문 95개조는 구텐베르크(1397~1468)의 인쇄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쇄되어 독일 전역에 퍼졌다.

위기를 느낀 로마 교황청은 1520년 11월에 루터를 파문했다. 그러자 루터는 12월 10일 비텐베르크 광장에서 교황의 파문장과 교회 법전 등을 불태웠다. 1521년 4월에 루터는 보름스 의회에 소환되어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단호하게 거부했다.

감금 직전이었던 루터는 작센의 제후 프리드리히 공의 보호를 받아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도피했다. 그곳에서 그는 1522년에 독일어판 신약성서를 출간하여 대중에게 보급시켰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이었다.

이후 루터파 교회는 북부 독일을 중심으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등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그런데 종교개혁의 주동자는 2세대인 장 칼뱅(1509~1564)이었다. 1536년에 칼뱅은 제네바에서 『기독교 강요(綱要)』를 출간하여 ‘예정설’을 주장하고 노동과 금욕을 중시하였다. 또한 신에 의해 이미 결정된 소명, 즉 ‘직업’에 충실하여야 한다고 설교했다.

칼뱅주의가 시민들에게 직업에 대한 자긍심을 자극시키자 칼뱅의 교리는 프랑스·스위스·프랑드르 지방(지금의 네델란드와 벨기에)·영국·스코틀랜드 등지로 확산되었다.2)

한편, 가톨릭은 신교의 종교개혁에 가만히 손 놓고 있지는 않았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년~1563년)를 통한 교리의 정립, 무능하거나 타락한 성직자에 대한 처벌과 규제, 예수회의 활발한 선교와 교육 사업3), 그리고 기존의 교리와 성찬식 고수4), 성상(聖像)과 성화(聖畵)의 유지 등을 통하여 신교의 도전에 정면 대응하였다. 반종교 개혁이었다.

여기에서 성상과 성화에 대하여 이야기 해보자. 칼뱅은 성모 마리아와 다른 성인들의 성상과 성화에 대해 공공연하게 적대감을 보였다.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그 무엇과도 비슷한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성서 구절에 따라 성화와 성상은 하느님의 영광을 그릇되게 표현하고 변질 시킨다는 것이다.(칼뱅 『기독교 강요』)5)

한편, 프랑드르 상업도시 안트베르펜은 일찍부터 루터파의 거점이었으나 1550년부터 칼뱅주의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1560년경에 칼뱅주의는 겐트·발랑시엔 등 프랑드르 지방 전체로 확산되었고, 1566년에는 안트베르펜에서 성상(聖像)파괴운동이 일어났다.

1) 개신교는 1517년을 종교개혁 원년으로 본다.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었다.

2) 막스 베버(1864~1920)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904)에서 칼뱅주의에서 자본주의의 근본정신을 찾았다. 칼뱅주의는 정당한 방법을 통해 축적한 부를 사악(邪惡)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3) 예수회는 스페인의 기사이자 수사인 로욜라가 1534년에 만든 수도회로 1540년 교황 바울로 3세의 승인을 얻은 후 교황에 대한 절대충성을 맹세하는 전위대가 되었고, 폴란드·아시아·신대륙 등지에 천주교를 전파시켰다.

4) 칼뱅은 성찬식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빵과 포도주와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올리비에 크리스텡 지음/체계병 옮김, 종교개혁, 시공사, 2005, p 66-69)

5) 올리비에 크리스텡 지음/체계병 옮김, 종교개혁, p 14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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