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을 다녀와서(2)
중국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을 다녀와서(2)
  • 정규철 인문학연구소 학여울 대표
  • 승인 2018.10.30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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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총본산 상하이 대한민국 임정청사와 홍커우 거사 현장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제국주의 침략의 사상적 도구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내년 상해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리는 의미에서 지난 10월 3일부터 7일까지 중국 상하이와 항저우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널려있는 독립운동 사적지를 탐방하고 돌아왔다. 이에 <시민의소리>는 이번 노정의 발자취를 2회에 걸쳐 지면에 소개하고자 한다. 소중한 글을 보내주신 정규철 인문학연구소 학여울 대표께 감사를 드린다.<편집자 주>

정규철 인문학연구소 학여울 대표

탐방 3일째 되는 날 우리 일행은 아침 일찍 임정청사로 향했다. 이곳은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이 창립된 다음 잠시 임시정부가 자리 잡은 청사로 상해 보창로(寶昌路) 329호였고, 다음 해 하비로(霞飛路) 460호로 옮겼다가 1926년부터 1932년 4월까지 마랑로(馬浪路, 현 馬當路) 보경리(普慶里) 4호로 옮긴 것이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자 일제의 추격을 피해 임정 요인들은 이곳을 떠나 항주와 가흥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임정은 진강(鎭江)으로 옮겼다가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장사(長沙), 광동(廣東), 기강(綦江)을 거쳐 1940년 9월 마지막으로 중경으로 옮겨 일제의 투항을 맞았다. 이곳 사적은 현재 우리 정부와 중국 정부의 협조로 잘 보존되고 있다.

임정청사에 들어서면서 잠시 숙연한 기분이 들었으며 백범 선생의 「양심건국(良心建國)」이라 쓴 휘호 앞에서는 부끄럽고 한없이 죄스러웠다. 민족의 선각자들이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머나먼 이국땅에 와서 항일독립운동에 전념했던 일을 떠올리니 후손으로서 분한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적수공권으로 임정을 수립 운영해 나가면서 온 겨레에게 희망의 등대 역할을 했던 이동녕(李東寧), 안태국(安泰國), 이시영(李始榮), 김구(金九), 이동휘(李東輝), 조소앙(趙素昻), 차이석(車利錫), 조성환(曺成煥), 송병조(宋秉祚), 김규식(金奎植), 조완구(趙玩九), 홍진(洪震), 박찬익(朴贊翊) 선생의 영정 앞에 고개 숙여 절하고 홍커우(虹口) 공원으로 향했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윤봉길(1908~1932) 의사는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3.1운동을 향리에서 겪었고 1930년 ‘대장부출가생부환(大丈夫出家生不還)’이란 글을 남기고 홀연히 상하이로 떠났다. 그리고 상하이에서 세탁소 외교원을 비롯해 모직공장의 직공 등 여러 일을 하면서 상해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이 주도하는 애국단에 가입하여 조국 광복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분이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는 김구 선생으로부터 받은 폭탄을 도시락에 숨겨가지고 일본 천황의 생일 축하를 겸한 상하이 사면전승기념식장인 홍커우 공원에 잠입하여 행사가 무르익을 무렵 폭탄을 투척하였다. 그 결과 일본의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白川) 대장과 일본거류민단장인 가와바다(河端貞次) 등이 폭사했고 일본군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와 9사단장 우에다 주중일본공사 등에 중상을 입혔다. 이 사건은 우리 민족의 조국광복에 대한 굳은 신념을 만천하에 알렸을 뿐 아니라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윤 의사는 거사 직후 일본 관헌에게 체포되어 오사카로 압송되었으며,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94년에 김영삼 전 대통령의 지시로 공원 안 울창한 숲 한가운데에 2층으로 된 윤봉길 의사의 사당이 건립되었다. 건물 1층에 전시실과 영정이 봉안되어 우리 일행을 반가이 맞이하는 듯하였다. 사당을 참배하고 나서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 보았는데 거사 당시의 모습을 영상으로 볼 수 있게 꾸며 놓았다. 여행사를 대표하여 한중문화교류회 강원구 박사가 동행하였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공원 경내에 있는 루쉰(魯迅) 묘자리가 윤 의사의 거사지라 하여 찾아가 보았다.

루쉰(1881~1936)은 저장성(浙江省) 사오싱(紹興) 사람으로 원래 이름은 저우수런(周樹人)이요, 자는 위차이(豫才)이다. 1902년 일본으로 건너가 의학을 공부하였으나 후일 문학가로 변신하였다. 그는 1918년 5월 루쉰이라는 필명으로 ‘광인일기(狂人日記)’를 발표하면서 새로운 문학운동의 기틀을 마련한 중국 현대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작가이다. 이후 10년 동안 눌함(吶喊), 열풍(熱風), 야초(野草), 화개집(華蓋集), 아큐정전(阿Q正傳) 등을 발표하였다. 루쉰은 1933년 4월 상하이 홍커우구 산인로(山陰路) 다루신촌(大陸新村) 9호로 이사하여 1936년 10월 19일 생을 마칠 때까지 기거하였다. 이 같은 인연으로 그의 유골은 1956년 홍커우 공원으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1,600㎡의 묘역 안에는 ‘루쉰선생묘(魯迅先生之墓)’란 마오의 친필이 새겨진 묘비와 동상이 세워져 있다.

여기서 루쉰의 사상적 편력을 잠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그의 사상적 출발은 사회진화론이었다. 옌푸(嚴復)가 영국에 유학을 가서 정식으로 헉슬리(T.H. Huxley)의 논문 「진화와 윤리(Evolution and Ethics)」를 번역하여 <천연론(天演論)>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였는데, 이 글의 요지는 ‘물긍천택 상우승열패(物兢天澤 傷優勝劣敗, Survival of fittest Struggle for Existence)’라는 헉슬리의 자연과학적 이해를 스펜서(H. Spencer)가 사회현상에 적용시킨 사회진화론, 또는 진화론적 세계관이다. 이 책은 중국 지식인에게 커다란 반응을 일으켰으며, 루쉰 또한 천연론의 구절을 암송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뒤 루쉰은 사회진화론에서 벗어나 서구 문화 맹신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돌아섰다. 그의 사상적 전환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민족주의 혁명가 장타이옌(章太炎, 1869~1936)이었다. 그는 마침내 1920년에서 30년대 자신의 기력이 다할 때까지 모든 ‘가짜 지식인들’을 국가와 민족의 적으로 보고 타협 없이 끈질기게 투쟁하였다. 1937년 10월 19일 루쉰 서거 1주기에 마오는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루쉰은 무너져가는 봉건사회 출신이다. 그러나 그는 기존의 것들에서 돌아서면서 상대의 뒷덜미를 찍어 내리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겪은 부패한 사회를 향해 공격하였고, 제국주의라는 나쁜 세력들을 향하여 돌격하였다. 그리고 발랄하고도 예리한 필봉으로서 암흑사회의 험한 얼굴들을 그려내었다. 그는 사실 하나의 탁월한 화가이기도 하다. 그는 적의 협박과 공갈, 유혹에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만 증오하는 모든 것들을 향하여 조금의 칼날도 내보이지 않은 채 비수와 같은 필봉을 그어 내었다. 그는 때때로 전쟁의 핏자국 속에 굳건히 저항하면서 전진을 외쳤다. 루쉰은 철저한 현실주의자이다. 그는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고 항상 굳은 결심을 하고 있었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제국주의 침략의 사상적 도구로 쓰였다. 우리나라에 진화론을 처음 도입한 사람은 유길준(俞吉濬)이다. 그는 게이오기주쿠대학(慶應義塾大学)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후쿠자와는 <탈아론(脫亞論)>을 주장하면서 조선을 야만이라고 규정하고, 힘으로 억압하여도 무방하다는 논리를 편 식민지 제국주의 옹호론자였다. 후쿠자와는 김옥균을 도왔기 때문에 얼핏 한국의 개화를 원하고 개화파와의 연대를 생각할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또한 한말 시인이자 학자인 김택영(金澤榮)은 중국에 망명하여 옌푸(嚴複, 1853~19212)와 교류하면서 그가 번역한 <천연론>에 대하여 담론을 나누기도 했다. 옌푸가 김택영에게 준 시가 전하기도 한다.

망명객 김통정(金通政)은 시를 잘 지었다.

 

“시마다 잃어버린 나라를 슬퍼하도다.

떠돌아다니는 여생이여

붓을 잡으면 정신이 웅혼하고

그 문장은 목숨을 가벼이 아노니

강남(江南)에 내리는 긴 빗속에

난초향기처럼 피어오르는 우수 어린 모습이여

필담으로 나눈 종이가 쌓이건만

인정은 아직도 뭉게뭉게 피어나네

<천연론>에 대한 그대의 간절한 말씀

양명(陽明) 선생인들 이리 간절하실까

무현금 어루만지며 그대 멀리 떠나 보내니

구름 덮인 바다만이 내 마음을 알아주리”

 

옌푸, 양계초(梁啓超)의 진화론적 개화사상은 이처럼 직접적으로 우리 개화 인사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양계초는 무술정변(1898) 이후 일본에 망명한 뒤, 요코하마(橫濱)에서 「청의보(淸議報)」(1898.11~1901.1), 「신민총보(新民叢報)」(1902. 1~1907. 10)를 발행하였다. 이 신문은 발간 즉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한중(韓中) 양국의 진화론적 세계관 수용은 “우승열패(優勝劣敗)” 가운데서 열패자의 극복논리로 받아들여졌다면 일본의 경우에는 우승자의 지배논리로 적용되었다. 이 같은 상변현상은 역사의 한 역설이기도 하다. 실제로 사회적 진화론은 침략자의 철학이기 때문에 피침략자의 경세철학으로서는 설득력과 정당성에 문제가 있다.

김준엽 선생은 상해, 항주와 가흥을 독립운동의 ‘성지’라고 표현한 바 있는데, 항일 총본산인 상하이 대한민국 임정청사와 홍커우 거사 현장을 살피고, 다시 항주로 이동하여 Merchan Marcopolo 호텔에 투숙하였다. 저장성의 성도 항저우는 중국 7대 고도 가운데 하나이며,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도시로 중국의 역사문화의 명성으로 지정되어 있다. 도시는 활기차고 시민들은 진취적이고 근면하다고 한다. 항저우만으로 유입되는 첸탕강(錢塘江)의 해소(海嘯, tidal bore)현상과 함께 강변에 1612년에 세워진 7층목탑인 진해탑(鎭海塔) 등이 유명하다고 하나 탐방코스에 들어 있지 않아 아쉬웠다.

대한민국임시정부항주유적지 기념관

아침 일찍 호텔을 출발해 항주시 장생로 55호(호변촌 23)에 위치한 ‘대한민국임시정부항주유적지 기념관’을 찾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는 항주시 정부에서 2002년부터 건설기획하고 2007년 11월에 정식 개관하였다고 한다. 2012년 한국독립기념관의 지원을 받아 보수가 이뤄졌고, 현재는 외관이나 내부가 깨끗하게 잘 보존되어 있다. 사무실이나 거처에 옛 모습 그대로 임정요원들의 손때 묻은 비품들이 가지런했다. 벽면에 항주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사진과 함께 해설을 달아 보기 좋게 전시하였다. 상해와 항주의 임정청사를 우리 학생들의 수학여행 코스로 정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김구 선생의 유묵 「지난행이(知難行易)」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더했다.

항주로 옮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2년 5월 15일~16일에 국무회의를 열고 위원들의 업무를 조정하는 등 정부 조직 전반을 재정비하였다. 외교, 재정, 군사 분야에서 독립운동단체의 최고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다듬은 것이다. 먼저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와 우의를 다지면서 일본과 대적하는 동아시아 국가와의 연대를 강조하였다. 1933년 5월 김구, 장개석의 회담을 통해 중국정부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러한 임정의 활동은 국내외 동포들에게 민족정신과 항일 독립투쟁 정신을 일깨워줬다.

여행 말미에 배를 타고 서호(西湖)를 유람하였다. 호숫가 나뭇잎은 노랗게 물들고 바람은 시원했다. 사적지 탐방으로 심신의 고단함도 잊고 있었는데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같이 홀가분하고 상쾌한 기분이었다. 서호는 원래 첸탕강과 서로 연결된 해안의 포구였는데 진흙과 모래로 막히면서 육지의 인공호로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중국의 10대 명승지로 꼽힐 만큼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하고 있다. 일찍이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 722~846)가 항주 태수로 있을 때 20만 명을 동원하여 서호의 물길을 쳐내고 남북향 제방을 쌓은 뒤 둑 위에 앵두와 버드나무를 심었다고 하는데, 운치가 있었다. 당·송 8대가 중 한사람인 소동파와 인연이 깊은 곳이기도 하다. 조정에서 왕안석과 대립하다가 1071년(36세) 항주 통판(通判)으로 밀려났는데, 대나무로 유명한 어잠(於潛)에서 “어잠승려의 녹균헌(於潛僧綠筠軒)”이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으며, 54세 때 항주 태수로 있으면서 많은 일화와 시를 남겨 지나는 이들의 이야기 거리가 되고 있는 듯하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혁명 전야처럼 긴장감이 감돌 정도로 무섭게 변화해 가고 있다. 기존의 관광자원 외에도 볼거리, 놀거리를 만들고, 각종 서비스 산업에서도 좋은 인상을 주었다. 우리 역사도 전환과 비약의 시간을 맞고 있어서 문득 조국강산이 뇌리를 스쳐갔다. 중국독립운동 사적지 탐방에 나서면서 금남표해록의 최부(崔溥) 선생이 가물가물 뇌리를 맴돌았는데, 저장성 영해(寧海)현, 월계진에 세워진 선생의 기념비를 참배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예정에 없던 일이라 아쉬움이 남았다. 최부 선생은 전남 나주 동강 출신으로 조선 성종 18년(1487) 9월에 제주 등 3읍 추쇄경차관으로 임명을 받았다. 추쇄라는 것은 도망 간 유민이나 죄인들을 조사해서 잡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9월 17일 고향에 들러 11월 중순에 제주에 도착하였다. 그가 여기서 두 달여 동안 업무를 수행하던 중에 성종 19년 정월 30일 나주 향가로부터 부친상의 부고를 받았다. 그가 제주를 출발하여 고향으로 가던 중 난파와 표류 끝에 중국 강남 지방으로 표착하게 된다. 그곳에서부터 육로로 6,000여 리나 되는 중국 땅을 남북으로 종단하여 북경을 거쳐 압록강에 이르는 기구한 기록이 최부 선생이 쓴 「금남표해록」이다. 우리 정부는 2007년 기념비를 세우고 선생의 유덕을 기리고 있다.

우리는 10월 7일 14시 30분 출발예정이었으나 청주공항 기상상황으로 2시간 여 늦게 출발하여 청주에 도착한 이후 광주로 돌아왔다.

기행을 마치면서 우리 겨레의 가슴에 아름다운 꿈을 심어주신 위대하신 애국선열 앞에 삼가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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