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을 다녀와서(1)
중국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을 다녀와서(1)
  • 정규철 인문학연구소 학여울 대표
  • 승인 2018.10.25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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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과 임정을 도운 절강인들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내년 상해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리는 의미에서 지난 10월 3일부터 7일까지 중국 상하이와 항저우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널려있는 독립운동 사적지를 탐방하고 돌아왔다. 이에 <시민의소리>는 이번 노정의 발자취를 2회에 걸쳐 지면에 소개하고자 한다. 소중한 글을 보내주신 정규철 인문학연구소 학여울 대표께 감사를 드린다.<편집자 주>

정규철 인문학연구소 학여울 대표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기획·추진한 ‘중국 독립운동사적지 탐방’을 마치고 그 소회의 일단을 적는다.

1919년 3.1운동과 그해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 된지 내년이면 한 세기를 맞는 시점에서 주관단체의 뜻에 깊이 느낀 바 있어 기꺼이 동참하기로 했다. 광주민주화운동동지회 회원 30여명이 함께하는 큰 행사인지라 미리 몇 가지 준비해 갈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24페이지 분량의 자료집을 만들고, 1944년에 제작된 <중국각성분포도>를 A4용지에 복사하여 책속에 끼웠다. 누가 시켜서라기보다는 내 스스로 그렇게 한 일이다. 이 지도는 1918년부터 일제가 패망하기 바로 전 해인 1944년까지에 걸쳐 완성된 아주 귀중한 자료이며, 여행자들로 하여금 중국 대륙 속의 여행지를 사전에 머릿속에 입력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나름대로의 뜻이 담겨있다. 지도는 전시에는 작전지도로, 평화시에는 국토종합계발계획을 수립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사용되기도 한다. 일제가 대륙을 송두리째 집어삼킬 목적으로 이 지도를 제작했다면 그들의 치밀함에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독립운동사적지라면 중국대륙과 시베리아 벌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지만, 이번 탐방길은 상하이와 항저우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널려있는 독립운동 사적지를 살피게끔 짜여졌다. 앞으로 2차 행사로 이어지게 되면 대륙 깊숙이 들어가 종착지인 충칭을 보게 되겠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 27년 가운데 상하이에 머문 13년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임정의 존재감을 만천하에 드높였을 뿐만 아니라 대한 남아로서 경천위지(經天緯地)의 큰 꿈을 안고 구국의 횃불을 들었다는 점에서 우리 역사상 높이 평가되는 사건의 하나이다.

임정의 이동 경로는 총길이 2100km이며 상하이(上海)에서 출발하여 항저우(杭州), 난징(南京), 창사(長沙), 광저우(廣州), 류저우(柳州)를 거쳐 충칭(重慶)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지구상에서 땅덩어리가 큰 나라를 보면 러시아, 캐나다, 중국, 미국 순으로 중국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넓은 면적을 자랑한다. 미국의 937만㎢ 보다 23만㎢ 더 큰 960만㎢인걸 보면 임정의 활동무대는 극히 제한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역사나 문화를 언급하지 않고서는 우리 역사와 문화를 설명하기 힘들만큼 상호 밀접한 관계를 맺고 교류해 왔으며 한글이 창제되기 전까지 우리의 인문은 한자로 기록되어 왔다. 독립투사들이 말로 소통이 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필담(筆談)을 주고받았을 거라는 상상도 충분히 가능하다.

우리의 일정은 예정한대로 순조로이 진행되었다. 10월 3일 개천절 아침 관광버스에 올라 청주국제공항으로 이동, 12시 20분 대한항공 여객기에 탑승하였다. 맑고 쾌청한 날씨에 기내에 앉아서 제비처럼 날아오르니 막혔던 방고래가 터지듯 가슴이 뻥 뚫리고 시원스러워 기분이 한결 상쾌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우리의 들녘은 누렇고 산은 짙푸르다.

정확히 1시간 45분 비행 끝에 저장성 항저우에 있는 샤오산(萧山)공항에 도착했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나오니 가이드 최국송 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 군은 연변출신 교포3세로 첫인상이 무척 호감이 가는 믿음직스러운 청년이었다. 대기 중인 관광버스에 올라 그의 안내를 받으며 저장성 성도이자 중국의 7대 고도인 항저우시 외곽 서당(西塘)으로 이동하였다. 여행 안내서에 ‘동방의 베니스’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수나라 때 건설된 대운하와 다리를 중심으로 발달한 수로 마을이다. 서너 시간쯤 차로 이동해, 차에서 내렸을 때는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이번이 중국여행 세 번째인 필자로선 초행 때 설렘과 흥분으로 감동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 왔다. 기온이나 날씨에 따른 환경도 우리와 별반 차이가 없어서 더 그러했다.

마을 한가운데로 운하가 흐르고 물 위엔 아치형 돌다리들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는데 많은 사람들이 왁자지껄 잔칫집처럼 보였다. 때마침 국경일 연휴여서 관광객들이 모여들었다는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고 물가엔 실버들이 날리고 어둠이 내리자 불빛이 반짝거렸다. 즐비하게 늘어 선 중국식 전통가옥들 사이로 좁은 골목길이 나 있고 길가에 있는 가게마다 관광 상품들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늦은 시간이었으나 일정에 맞추어 나룻배를 타고 여흥을 즐겼는데, 아마도 가벼운 몸풀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일행은 가흥(嘉興)으로 이동하여 호텔에 투숙하니 밤 10시가 넘었다.

김구(金九) 선생 피난처(避難處)

둘째 날, 9시에 호텔을 나서 김구(金九) 선생 피난처(避難處)인 가흥 남문 매만가(梅灣街) 76호 진동생(陳桐生)의 집을 찾았다. 백범 김구 선생은 황해도 태생으로 안중근 의사 집안과는 각별한 사이였다. 선생은 1919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인도의 간디가 비폭력무저항주의를 표방한데 비해 선생은 무력에 의한 국권회복을 기본노선으로 하였다. 1932년 4월 29일 홍커우공원 사건이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후 일제는 현상금 60만원을 걸고 수사를 폈는데, 가흥의 애국지사인 저보성의 도움을 받아 피신하였다. 가흥, 해염, 항주, 남경 등지를 떠돌며 2년여 동안 피난 다닌 끝에 1936년 2월 가흥을 떠났다.

우리가 찾은 매만가 76호는 진동생 선생 주택으로 청말에 지은 목조 양식 2층 건물이다. 남쪽은 호수와 맞닿아 있으며, 배를 밀고 호수로 나아 갈수 있는 좋은 피신처로 보였다. 1932년 5월 백범 선생은 저보성의 지원으로 이곳에 몸을 숨겼는데, 가흥시 정부는 김구 선생의 피난처를 2000년 시급문물보호단위로 지정했다가 2005년 전면 개보수하여 성급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하고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곳 독립운동 사적지를 둘러보면서 당시 한중간의 깊은 우의를 느낄 수 있었다. 가흥에는 홍커우 의거 후 임정요인과 가족들이 옮겨와 살았던 일휘교(日暉橋) 17호가 있는데, 청말에 지은 정원식 4칸 이층집으로 건축면적은 260㎡이다. 2005년 시정부가 전면 수리·복원 하였는데, ‘임시정부 요인 숙소진열실’이 말끔히 정리 되어 있고 숙소 내부 또한 옛 모습 그대로 탁자, 의자, 침대까지 복원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뿌듯한 감동을 자아내게 했다.

당시 요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동녕, 김의한, 박찬익, 엄항섭 선생을 비롯하여 이시영, 조성환, 조완구, 차이석, 김구 선생인데 함께 찍은 사진이 게시되어 더욱 실감이 났다. 다시 김구 선생이 숨어 지낸 해염으로 옮겨 ‘재청별서’를 찾았다. 앞서 말한 저보성의 도움으로 숨어 지내던 곳인데, 호숫가에 있는 아름다운 별장으로 앞에는 호수로가 탁 트여 있으며 탈출 비상구까지 갖추어져 있어 한숨 돌리면서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쯤에서 김구 선생과 임정을 도운 절강인들을 잠시 살필 필요가 있겠다.

1932년 5월 20일 저보성은 가족의 안위를 뒤로 하고 김구와 임정 요인들을 고향인 가흥으로 긴급 피신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준 인물이다. 진보생은 저보성의 양아들로 가흥으로 피신한 김구의 생활과 안전을 책임졌다. 저봉장 역시 저보성의 아들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김구 선생과 임정 요인들의 안전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다. 주가예(朱佳蕊)는 시아버지 저보성의 지시에 따라 위험을 무릅쓰며 김구 선생을 재청별장으로 피신시킨 분이며 사진 속의 그녀의 모습은 재기 발랄해 보였다. 김구 선생은 이곳에서 반년을 지냈다. 호숫가에 울창한 대나무 숲이 바람소리를 낸다. 언제 이뤄질지도 모르는 조국의 광복을 하염없이 기다리면서 시시각각 조여 오는 생명의 위협을 극복해냈던 독립혁명가들의 흉금이 과연 어떠했을지 가슴이 먹먹해 지면서 처연한 느낌과 함께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주애보(朱愛寶)라는 여인은 1933년 여름 가흥에서 광동인 장진구로 위장한 김구를 안전하게 피신시키기 위해 배를 타고 운하를 돌며 일본경찰의 추격을 따돌린 지혜로운 여인이다. 해염에서 빠져 나오는 길가 노점에서 귤을 한바구니 사서 나눠 먹었다. 제주 감귤에 비해 당도는 떨어졌으나 마른 목을 축여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고 피로회복에 특효가 있었다.

국경일 연휴기간이어서 가는 곳마다 관광객들로 붐볐다. 가흥남호(南湖)를 찾았을 때도 섬 안에 있는 호심도(湖心島)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남호는 홍커우공원 의거를 계기로 항저우로 이동한 임정이 힘겨운 싸움을 하다가 1932년 김구 선생 주도로 ‘남호회의’를 열었던 곳이며 혁명의 전환점을 가져오게 한 역사적인 곳이다. 이로 말미암아 임정은 항일역량을 보존하면서 당시 세계가 주목하는 국제 반파시즘 진영의 한 갈래 대오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곳은 중국 현대사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방종정(訪踵亭)’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현판 글씨는 군사위상주석(軍事委常主席) 양상곤(楊尙昆)이 썼으며, 1921년 중국 공산당 1차 회의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 1964년 4월 5일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동필무(董必武)의 방문비가 눈길을 끈다.

매헌

관광버스를 타고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상해로 이동하는 동안 차 안에 있는 시간이 보통 두세 시간 정도여서 차창으로 바깥 풍경을 눈여겨보고 싶었는데 촘촘히 심어 놓은 가로수들에 가려서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모처럼 사적탐방 길에 눈을 붙일 수도 없는 일이어서 가끔씩 열린 틈으로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잘 알려진 대로 상하이는 베이징, 텐진, 충칭과 더불어 중국 4대 중앙정부직할시이자 중국 최대의 종합공업도시이며 과학문화중심도시이다. 면적은 5,800㎢, 인구는 급속히 증가하는 추세라고 한다. 일찍이 양쯔강 하구의 삼각주에 발달한 도시로 인공수로망인 크리크(creek)가 그물망처럼 펼쳐져 있다. 연평균 기온은 15.5℃이며, 강수량은 1,000mm에 사람의 활동과 식생에 가장 알맞은 계절풍 기후이다. 현재 상하이는 우쑹커우(吳松口) 좌안과 양쯔강 우안에 자리 잡은 바오산(寶山) 철강공업단지, 가오차오(高橋) 보세구역, 진차오(金橋) 수출가공공업지역, 장강(張江) 하이테크 개발지역, 루자쭈이 금융무역지역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밖에도 푸둥浦東)지역은 중국 제1의 종합공업지대일 뿐만 아니라 세계 선진열강들이 앞 다투어 자본을 투자하는 국제적인 종합공업지대로 성장하고 있다. 최근 개통된 전장 1,262㎞의 북경과 상해를 연결하는 징후(京沪)고속도로와 시 내부 순환고가도로, 남북고가도로의 준공 등 도시 기반 시설 확충과 함께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우리 일행은 시 내부의 순환고가도로를 타고 이동하여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이슥한 밤시간에 황푸강(黃浦江)변으로 나갔다. 상하이 명물 전시(電視, 텔레비전) 중계탑 동방명주(洞方明珠)가 에펠탑만큼이나 하늘 높이 솟아 반짝였다. 그 주변은 초현대식 건물들이 빼곡히 마천루를 이뤘는데, 그곳에선 우리나라 기업 미래에셋사옥이 눈에 들어왔다.

상하이시 중산동(中山東) 1로와 2로로 이어지는 황푸강 연안지역은 상하이시의 중심업무지구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이곳을 찾고 나서 천지가 개벽했다고 평가 했는데 과연 그러하다.(다음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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