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히 부는 바람과 함께 가을은 쓸쓸하다. 거두는 계절이자, 떨어지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늦가을 비가 한번 내리면 언제 다가왔는지 매서운 바람을 동반한 겨울손님이 덥석 손을 부여잡는다. 어쩔 수 없는 계절의 탓이겠지만 떠나는 가을을 아쉬워한다. 새봄을 맞이하려는 부푼 기대를 갖고서. 거센 바람이 부니 수놓았던 수풀이 절반이 비었다. 이제 서서히 온 산이 가을빛을 거두어 가고 있으니 남아 있는 붉은 잎을 푸른 물을 띄우네라고 읊은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雨後(우후) / 동고 최립
거센 바람 부는 아침 부슬비 내리더니
비단 같이 수놓은 수풀 절반 비었구나.
온 산은 가을빛 거둬 푸른빛을 띄우네.
朝來風急雨濛濛 錦繡千林一半空
조내풍급우몽몽 금수천림일반공
已作漫山秋色了 殘紅與泛碧溪中
이작만산추색료 잔홍여범벽계중
남아 있는 붉은 잎으로 푸른 물을 띄우네(雨後)로 번역해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동고(東皐) 최립(崔岦:1539~1612)이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거센 바람 부는 아침 부슬비 주룩주록 내리더니 / 수놓은 비단 같던 수풀 물결이 이제 절반은 비었구려 / 이미 온 산은 서서히 가을빛을 거두고 있으니 / 남아 있는 붉은 잎으로 푸른 물을 띄우고 있네]라고 번역된다.
위 시제는 [비가 온 뒤에는]으로 번역된다. 가을은 아침 저녁으로 소소함을 느끼게 한다. 인생으로 치면 시인의 나이 50을 넘기고 화갑인 60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늦가을엔 비애를 느낀다. 여름내 무르익었던 곡식을 거두어들이는가 하면 주렁주렁 열렸던 과일도 수확하게 된다. 한 생명을 푸르게 키워놓는가 했더니 낙엽만 말없이 떨어져 한 줌의 부토(腐土)로 돌아가는 엄숙한 순간이리라.
시인은 저물어가는 가을에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린 시간에 서성인다. 거센 바람 부는 아침 부슬비 주룩주룩 내리더니 수놓은 비단 같던 수풀 물결이 이제 절반은 비었다고 했다. 봄의 꽃보다 더 붉어 비단을 수놓은 듯했던 가을 단풍이 이제는 듬성듬성 쓸쓸해 보인다. 화려함을 발산했던 가을 산은 이제 수수함으로 돌아와, 아직은 맑고 푸른 시냇물에 여전히 붉디붉은 나뭇잎을 흘려보내며 내년의 봄을 기약한다.
그러면서 화자는 온 산을 수놓았던 수풀은 절반이 비었다면서 가을빛을 거두고 있다고 했다. 외롭게 남아있는 붉은 잎을 푸른 물에 띄워 보내면서 싱그러운 푸르름을 더해 보고 싶다는 강한 소망을 담고 있다.
위 감상적 평설의 요지는 ‘아침 부슬비 주룩주룩 수풀물결 텅 비었고, 온 산엔 가을비 거둬 붉은 구슬에 푸른 잎 띄우네’ 라는 상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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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동고(東皐) 최립(崔岦:1539~1612)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호는 간이(簡易), 동고(東皐)이다. 1561년 급제, 재령군수·공주목사·전주부윤·승문원제조·강릉부사·형조참판 등을 역임 한 후 사직하고 평양에 은거하였다. 주청사의 질정관·주청부사로 명나라에 여러 차례 다녀왔다.
【한자와 어구】
朝: 아침. 來風: 바람이 불다. 急雨: 거센 비가 내리다. 濛濛: 비가 내리는 모양. 錦繡: 비단으로 수를 놓다. 千林: 많은 숲. 一半空: 절반은 비다. // 已: 이미. 作: 짓다. 漫山: 온 산. 秋色了: 가을빛을 거두다. 殘紅: 남은 붉은 잎. 與: ~으로. 泛: 띄우다. 碧溪中: 푸른 시냇물 가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