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
상트페테르부르크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8.07.09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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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를 다녀왔다. 2007년 이후 두 번째 방문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예술과 혁명의 도시이다.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인 에르미타주 박물관이 있고,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란 시로 유명한 푸슈킨(1799~1837)이 결투하다가 죽은 곳이며,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의 소설 『죄와 벌』이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1917년 10월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무너진 때문인지, 나이 드신 분들에게는 ‘상트페테르부르크’보다 ‘레닌그라드’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다.

 

쓸쓸한 물결이 이는 강가에

그는 서 있었다. 상념에 잠겨...

 

그는 생각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스웨덴을 위협하리라.

오만한 이웃나라를 혼내주기 위해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리라.

- 푸슈킨, 『청동기사』 (183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심지 데카브리스트 광장의 ‘청동기마상’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심지 데카브리스트 광장에서 ‘청동기마상’을 보았다. 뒷발로 뱀을 짓밟은 채 앞발을 치켜들고 울부짖는 생동감 넘치는 말을 타고 있는 표트르 대제. 그의 한 손은 네바 강 건너편을 가리키고 있다.

600톤이나 되는 반석에는 러시아어와 라틴어로 “표트르 1세에게 에카테리나 2세로부터 1782”라고 새겨져 있다. 남편 표트르 3세를 폐위시키고 황제가 된 독일 출신 에카테리나 여제가 표트르 대제에게 헌정한 것이다. 에카테리나 여제의 정통성이 표트르 대제로부터 내려온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인데, 프랑스 건축가 필코네가 12년 동안 고심 끝에 만들었단다.

표트르 대제(1672~1725)는 1712년에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수도를 옮기고 1721년에 스웨덴을 항복시켜 발트 해 연안을 차지한 강력한 통치자이다.

1695년에 표트르는 오스만튀르크와 전쟁에 포병 장교로 종군했다. 러시아 군은 대규모 병력으로 아조프 요새를 공격했지만 요새는 끄덕하지 않았고, 오히려 러시아 군만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오스만튀르크 군이 선전했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튀르크 해군이 흑해를 통해서 풍부한 군수물자는 물론 보충 병력까지 수송했기 때문이었다. 해군을 보유하지 못한 러시아 군으로서는 이 광경을 뻔히 보면서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표트르는 이 전투를 통해서 해군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1696년에 표트르와 공동 차르였던 이복형 이반이 사망하자 그는 명실상부한 차르가 되었다. 그의 첫 번째 관심사는 아조프 요새를 함락하는 것이었다. 그는 우격다짐으로 30척의 어설픈 전함을 만들었다.

표트르는 다시 아조프 요새를 공격하면서 이 전함들을 이용해 튀르크 해군에 대항했다. 러시아 함대는 튀르크의 수송선단 저지에 성공했고, 표트르는 1696년 7월에 아조프 요새를 함락시켰다.

1697년 3월, 포병 하사관 표트르 미하일로프로 신분으로 위장한 표트르는 250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거느리고 유럽 시찰에 나섰다. 사절단은 라트비아, 프로이센, 네덜란드, 영국, 오스트리아 등 여러 나라를 순방했다. 그는 라트비아에선 축성술을 배우고, 프로이센에서는 폭탄 제조법을 배웠으며, 네델란드 사르담에서는 조선소 목수로 일했고 암스테르담에서는 군함제조에 참여했다. 또 영국에서는 해양군사학을 공부하고, 그리니치 천문대도 방문하고 뉴턴을 만나기도 했다. 다음에는 오스트리아를 찾았다. 빈은 합스부르크 왕국의 중심이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이탈리아로 떠나려는 즈음인 1698년 7월에 표트르는 친위대 스트렐치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급보를 받았다. 그는 급거 귀국길에 올랐다. 다행히도 반란은 쉽게 진압되었으나 모스크바로 돌아온 표트르는 반란 가담자 1,200명을 모두 처형하고 시체들을 한동안 매달아두었다.

저항세력을 제거한 표트르는 본격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먼저 백성들에게 턱수염부터 자르도록 했고 불이행하면 ‘수염세’를 부과했다. 복장도 거추장스러운 러시아 복장에서 간편한 양복으로 바꾸었다.

군대 개혁도 단행했다. 1700년에 징병제를 실시했고 사관학교를 세웠으며, 대포·군함을 생산하여 전투력을 향상시켰다.

강력한 솔선수범의 개혁 군주 표트르! 그는 유럽의 근대화를 받아들여 부국강병에 매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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