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어릴 적에 가족이 함께 숲으로 나들이를 간 일이 있었다. 공터에 자리를 펴고 앉자 여섯 살 배기 큰 아이가 갑자기 “아빠, 숲 속에 시계가 있어요.” 하며 내 팔을 잡아당기며 숲 속으로 시계를 찾으러 가자고 했다.
영문을 몰라 하다가 이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고 눈물 반 웃음 반 나는 묘한 심정이 되었다. 숲 속에서 뻐꾸기가 울고 있었는데 아이는 집에 있는 뻐꾸기시계를 연상하고 숲 속으로 그걸 찾으러 가자는 말이었다.
그럴 것이 아이는 난생 처음으로 진짜 뻐꾸기 울음소리를 듣고 그것이 뻐꾸기시계인 줄로 알았던 것이다. 우리 집에 있는 뻐꾸기시계는 시간마다 나무상자의 문짝이 열리며 뻐꾸기 인형이 밖으로 나와서 ‘뻐꾹, 뻐꾹’ 소리를 내고는 집으로 들어갔다.
내가 어릴 적 도시 아이들은 벼를 모르고 자란 탓에 벼는 나무에서 열리는 줄 안다고 했다. 그때 우리 아이들을 보고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 후로 자주 야외로 데리고 다녔다. 처음에는 개미를 보고도 뒷걸음치던 아이들이 나비를 좇아 돌아다니게끔 되었다. 처음으로 자연과 친한 관계를 맺게 된 셈이다.
지금 나는 어느새 잠 없는 어른이 되어 매일 새벽 건너 편 숲에서 우는 뻐꾸기 소리를 듣고 일어난다. 뻐꾸기란 놈이 꼭 이른 아침 다섯 시 무렵이면 집 앞 숲에 날아와서는 울음소리를 낸다. 마치 날더러 아침이 되었으니 어서 일어나란 듯 울어댄다.
내게는 숲 속의 뻐꾸기 소리가 알람이 되어주고 있다. 아마 뻐꾸기 소리도 6월이 지나면 더는 듣기 어려울 것이다. 새끼들을 키우느라 울 일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자라 흙을 밟아보지 못한 세대인 아스팔트 킨트(Asphalt Kint)들은 자연과 너무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문명의 편리에 도취한 나머지 자연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자연과 친하게 지낼 궁리를 하는 대신 자연을 이용해먹을 궁리만 하다가 많은 귀한 것들을 놓치고 있다.
우리 인간은 무엇인가 큰 착각에 빠져 있는지 모른다. 자연을 파괴하면서도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내가 사는 고장에서는 여기저기서 숲이 우거진 구릉지를 깎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무슨 건물들을 지으려는 모양이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울타리를 둘러치고 일을 벌이고 있어 사람들은 처음에는 산을 깎아내는지도 잘 모른다. 숲을 쳐내고 산을 깎아 벌건 흙이 큰 상처 모양으로 드러난 모습은 흉측하고 무섭기조차 하다. 그런 자리에 태양광을 설치한다는 말도 있다. 돈이 벌린다고 한다.
아마도 나이가 들고 나서의 일 같은데 자연의 모든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귀한 것들이라는 것을 나는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뭐 자연지상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다. 인간 역시 자연의 산물이며 자연이 내놓은 다른 생명체보다 더 귀한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는 생각이다.
진화론에 따르면 우리 눈에 보이는 나무며, 새며, 풀이며, 나비며 모든 생물들이 단세포가 인간으로 진화하는 여정의 중간중간에서 매개물이 된 ‘조상’들이라고 한다. 내가 지내온 인생 여정이 쓸모없는 것이 아니듯이 인간의 진화에 징검다리였던 저것들 또한 귀한 것들이었던 것들이다.
게다가 지금 저 생명체들은 자연을 구성하는 당당한 일원들이다. 만일 저것들이 없다면 인간 또한 자연에서 사라지고 말 터이다. 풀 한 포기, 개미 한 마리, 나무 한 그루를 예사로 볼 일이 아니다. 심지어 모기조차도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없애버린다면 자연의 먹이사슬이 깨진다는 말도 있다. 모기는 모기가 되기 전 웅덩이 속에서 애벌레로 있을 때 물고기들이 잡아먹고 사는 ‘먹이’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가 신비한 생명체라면 저것들 또한 그러하다. 이런 생각이 사무쳐서 나는 저 ‘하찮은’ 생명들이 인간의 친구요, 조상이요, 이웃이라고 감히 믿고 싶고 그렇게 생각한다. 내 생각이 잘못되지 않다면 함부로 나무를 벌채하고 산을 깎아내고 하는 일들은 심사숙고한 끝에 우리의 친구들을 마주해야 한다고 본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숲에 가서 나무를 벨 때 나무에게 절을 하고 용서를 구했다고 한다. 여사여사해서 나무를 베려 하니 받아들여달라고 청했던 것이다. 그들은 마을에 떠도는 매에게도 사람과 똑같은 이름을 붙여주고 안개, 강에게도 사람들의 이름으로 불러주었다.
영국 시인 존 던은 노래한다. ‘그 누구도 스스로 온전한 섬이 아니다./모든 사람은 대륙의 일부분,/전체의 부분이다.’ 이 싯귀에서 ‘누구’를 모든 생명체로, ‘대륙’을 자연으로 바꾸어 읽어도 시의 뜻이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자연의 거대한 그물망의 그물코인 것이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무분별한 자연 파괴를 볼 때마다 나는 서글프다. 당국에 항의를 했더니 ‘법대로 하는 일이므로 어쩔 수 없다.’고 한다. 법 위에 ‘자연법’이 있지 않을까. 자연을 굴리는 대 질서 말이다.
숲 속에 시계가 살도록 내버려 두라. 이제 그만 자연을 성가시게 하라. 나는 그렇게 외치고 싶다. 존 던의 시는 이렇게 맺는다. ‘그 누구의 죽음도 나를 줄어들게 한다,/왜냐하면 나는 인류에 개입되어 있으니까./그러니 누군가를 보내 알려하지 마라,/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냐고./종은 당신을 위해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