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하도 미세먼지가 극성을 부리기에 화분 몇 개를 구해 집안에 들여 놓았다. 벵골 고무나무, 산세비에리아, 등등. 이것들이 미세먼지를 정화시켜 준다는 신문기사들을 보고서다. 그런데 식물마다 다 식생이 다르다.
산세비에리아 같은 경우는 한 달에 한 번 물을 조금 주어야 한다고 화원 주인이 말했다. 내 생각에 작은 화분에 심겨 있는 제법 키 큰 잎새들이 어떻게 물을 거의 먹지 않고 지낸다는 것인지 잘 이해가 안 되었다.
노지라면 몰라도 이슬도 먹을 수 없는 집안에 있는 화분에 한 달에 한 번만 물을 주라고? 그것도 아주 조금만? 나는 그 말을 무시하고 다른 나무들처럼 화분의 흙이 말라 있다 싶으면 물을 주었다. 화분을 들여온 지 서너 달이 되었을까. 화분에 가득 나 있던 산세비에리아 잎새들이 죽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까지도 왜 죽어가는지를 도통 몰랐다. 마트에 가서 거름을 사다 뿌려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산세비에리아 잎새들은 잎새 끄트머리에서부터 죽기 시작해 아래로 죽음의 그림자가 뻗쳐 내려왔다. 속수무책이었다. 종당에는 잎새들이 다 죽어버리고 마지막 한 잎만 남았다.
이것마저도 위에서부터 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참담한 기분이었다. 뭐랄까, 마치 무슨 불운한 징조를 보는 듯한 느낌. 그래서 마지막 잎에서 죽어간 부분을 도려내고 뒤늦게 산세비에리아 살리기 전투로 들어갔다. 물론 물도 안 주고 화분의 굳은 흙을 쿡 쿡 쑤셔서 공기도 좀 들어가게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수를 다 기울였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산세비에리아 잎은 마지막 엄지손가락 크기의 잎새만이 푸른 기운을 쬐금 간직한 채 다 죽은 모습으로 있었다. 저 푸른 부분마저 죽어버리면 다 끝나는구나.
아내는 산세비에리아 전체 포기가 다 죽어버렸는데 그깐 쬐끔 남은 잎새로 어떻게 되살아나겠느냐며 새로 산세비에리아 화분을 사라고 종용했다. 안될 말이다. 나는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며 산세비에리아 살리기가 내게 주어진 일상의 임무인 것처럼 총력을 기울였다. 되살리기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런데도 산세비에리아 잎새는 조금씩 죽어 내려갔다. 나는 또 죽은 부분을 잘라내고 희미하게 남아 있는 푸른 기운에 기대어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화분의 흙을 조금씩 뒤집어주는 것뿐이었다.
이건 순전히 내 억지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화분 하나가 죽는다고 해서 무슨 불운을 불러오겠는가. 나는 용단을 내려서 손가락 한 마디만큼 남아 있는 산세비에리아 잎을 살짝 들어내서 뿌리를 보고 싶었다. 뿌리가 죽었다면 그냥 버릴 생각으로.
그랬더니 뿌리가 흙을 움켜쥐고는 잘 따라 나오지 않았다. 나는 얼른 도로 풀뿌리를 눌러 흙을 다독이고는 아직 죽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뿌리가 완강히 버티고 있지 않은가. 죽었다면 뿌리가 쉽게 공중으로 딸려 나왔을 것이다.
물을 뱁새 눈물만큼 뿌려주고 계속 화분을 지켜보았다. 그러고 6월 어느 날 죽음의 그림자가 내려가기를 멈춘 산세비에리아 마지막 잎새 바로 옆에서 아주 희미한 바늘 촉 같은 점이 새로 보였다. 대체 저것이 무엇일까. 흙이 솟아난 것은 아니다.
돋보기를 비추고 보니 그것은 실낱 같은 산세비에리아 잎의 새 움이었다. 처음으로 가느다란 희망의 촉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나는 ‘지성이면 감천이다’ 하는 기분으로 생명의 신비를 새삼 느꼈다. 그 이튿날 외국에 사는 아들이 몇 년만에 귀국했다. 산세비에리아 잎의 새끼 친 촉의 나타남과 아들의 귀국을 이어놓고 보니 좋은 징조로 느껴졌다.
아들 내외가 내 집에서 함께 지내는 동안 산세비에리아 새끼촉은 조금씩 잎새 특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눈에 띄게 커가고 있었다. 잎새 가장자리로는 노란색의 테를 두르고 안으로는 짙은 녹색 바탕을 한 새끼 잎새가 마치 깔때기 모양으로 자라나고 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새로 자라나기 시작한 새끼 잎 옆에 또 하나의 촉이 올라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아들에게 “너희가 와서 죽어가던 화초가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아.” 말해놓고 보니 정말 그랬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가람 이병기 시인은 난초를 기르면서 ‘환희의 별유세계(別有世界)에 들어 무아무상(無我無想)의 경지’를 보았다고 했다. 난초는 나 같은 사람은 엄두도 못 낼 정도로 기르기 어렵다. 가람 시인의 말대로 ‘화초 가운데 난이 가장 기르기 어렵다.’고 한다.
나는 그런 정신의 교감을 하는 식물이 아니라 미세먼지를 정화하기 위한 기능성 식물을 기르는데도 끙끙거린다. 어쨌거나 산세비에리아가 화분을 가득 채우고 마침내 꽃을 피워 향을 퍼뜨리는 꿈을 나는 계속 밀고 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