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 이는 바람
숲에 이는 바람
  • 문틈 시인
  • 승인 2018.05.31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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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을 해보려도 도저히 하지 못할 풍경이다. 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 아무리 적절한 문장을 써보려 애쓰지만 냉큼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바람에 나무숲이 흔들리는 풍경을 바라볼 뿐이다. 대체 저 숲의 나무 우듬지들, 가지들, 잎들이 바람에 일제히 이리저리 흔들리는 장면을 혀 짧은 언어로 어찌 오롯이 새겨낼 수 있으랴.
숲이 바람에 흔들린다, 이런 문장으로는 도저히 그 풍경에 가 닿지 못한다. 무슨 안 보이는 거대한 손이 있어 숲을 흔드는 것 같은 느낌. 숲은 바람에 몸을 맡기고 바람이 흔드는 대로 움직인다. 마치 청보리밭이 바람에 일제히 흔들리는 것 같은, 아니 그보다 더 압도적인 흔들림, 흔들림.
그것은 살아 있다는 것. 더불어 숲 전체가 한 몸으로 연대하고 있다는 것. 바람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 그런 느낌들이 휘몰아와 내 감정에 소용돌이친다. 내가 저 숲의 한 나무 같다는 감정이입 상태로 된다.

그 많던 숲의 새들은 숲이 바람에 마구 흔들리자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새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다들 어디로 피해간 모양이다. 나무가 없으면 못살 것처럼 나무와 친하게 지내던 새들이 뱌람이 불면 죄다 떠난다.
숲을 거처 삼아 지내던 온갖 새들이 거센 바람이 불자 종적을 감추어버린 것이다. 참 무정한지고! 새를 잃은 나무숲이 바람이 몰아치는 대로 마구 흔들린다. 어찌 보면 숲에 바람이 이는 순간 숲은 거대한 외로움 속에서 자맥질하는 듯한 모습이다.
바라보고 있자니 우듬지 쪽은 큰 파도처럼 더 크게 요동을 친다. 우듬지 아래 나뭇가지들은 작게 흔들리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흔들림이 더 작아진다. 더 아래 기둥 부분은 거의 흔들림이 없다. 이제야 무엇이 보인다. 나무숲의 흔들림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나무들은 위로 뻗어 나간 나뭇가지들이 바람이 불 적에 이리저리 흔들리도록 가늘고 유연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하늘과 땅이 벌여놓은 사업이란 것이 이렇다. 숲에 이는 바람을 통해서 대자연의 본질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과 저것, 모든 것에 대한 적응, 조화, 협력, 방어, 유익을 향하여 작동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새들이 나무숲을 도망간 것은 아닐 것이다. 바람 속에 나무를 두고 새가 떠난 것은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려고 해서일 것이다. 우리는 모르지만 바람과 나무와 새는 그것들이 서로 어떤 알음알이로 되어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가령 바람도 사방팔방에서 불고 계절 따라 달리 불어 그 오는 곳과 가는 곳을 가늠할 수가 없지만 나무나 새들은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거다.
예를 들면 북풍은 찬 기운을 몰아오고. 남풍은 잔잔하고 부드럽고. 동풍은 건조하고. 서풍은 대개 비를 몰아온다. 이 정도를 사람이 알진대 나무들, 새들이야 서로 한통속인데 모르겠는가싶다.

새들은 다가오는 여름에 바람이 얼마나 거셀지 미리 알아 둥지를 맞춤형으로 짓는다고 하니 그런 것쯤은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성서에는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라고 바람의 행로를 지적한다.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진다. 바람은 인간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비유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흡사 바람의 행로 같다. 바람의 움직임은 보이는데 정작 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숲이 흔들려서 바람을 보여준다.
바람은 부는 것 같았는데 사라지고 보이지도 않고 언제 바람이 불었느냐는 식이다. 바람에 생을 견주어 보면 들어맞는 일이 많다. 정처 없이 건듯 부는 것이 바람이니 누군들 바람의 진로를 알겠는가. 숲은 다만 바람이 불면 그만큼 흔들릴 따름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숲의 풍경을 보면서 나는 신발 끈을 다시 맨다. 폴 발레리가 노래한 대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그런 마음이 들어서다. 바람에 숲이 흔들리는 모습만큼 생의 충동을 격하게 느끼게 하는 것도 드물지 싶다. 뭐랄까, 삶에 대한 비관과 무기력함에 시달리는 일상에서 숲 전체가 바람에 흔들리는 광경은 존재감을 극대화시킨다. 살아 있다는 것, 살아야 한다는 것을 웅장하게 보여준다.

비단 숲에 이는 바람뿐이 아닐 것이다. 자연에서 나는 수많은 격한 장면들을 목도한다. 가없는 바다에서 물결쳐오는 수수만만의 파도를 볼 때 그렇듯이 숲이 흔들리는 모습은 내게 살아야 한다고,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이제 계절은 꽃철이 다하고 잎철로 가는 중이다. 여름에는 더 자주 숲이 흔들리는 풍경을 보게 될 것이다. 흔들리는 숲이 결국 제 모습으로 돌아오듯이 그때마다 나도 또한 본 모습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바람 부는 숲에서 새들이 잠시 떠났다고 해서 탓할 까닭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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