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만나는 친구
매달 만나는 친구
  • 문틈 시인
  • 승인 2018.05.10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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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한 번 만나는 친구가 있다. 십대 시절의 친구다. 친구는 교직에서 은퇴하고 나는 회사에서 퇴직한 후 하릴없이 지내던 어느 날 수십 년 만에 다시 만난 이후 가깝게 지내게 된 사이다.

친구는 달마다 하루를 정해 차를 몰고 온다. 차를 몰고 온다지만 꽤나 멀리서 오게 되니 분명 그런 마음은 아니겠지만 품을 들여오는 셈이다. (나는 운전면허가 없다.) 나는 늘 미안하고 고맙게 생각한다. 그러기를 벌써 3년이나 되었다. 만나서 딱히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둘이서 한 시간쯤 걸리는 조롱길이나 들길을 산책하고 점심을 먹고 헤어진다.

둘이 만나서 나누는 대화는 특별한 주제가 없다. 서로 아내와 자식들 이야기, 건강에 무엇이 좋다고 하더라는 이야기 같은 것을 나눈다. 정치 이야기 같은 것은 일체 하지 않는다. 서로 견해가 다를 수도 있고, 또 권력이 궐 안에서 벌이는 일을 놓고 우리 같은 민초들끼리 무어라 해봤자 우리가 초라해 보이는데다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여기고 싶어서일 것이다. 이 만남을 굳이 말한다면 서로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와 격려의 공유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중학교 앞길에는 ‘문화빵집’이 있었는데 거의 날마다 그 빵을 함께 사먹었던 기억이 있다. 한 번은 내가 사면, 다음번에는 친구가 사는 식으로. 빵집 주인은 밀가루를 물에 되게 풀어서 주전자에 담는다. 연탄불 위에 놓여 있는 쇠로 만든 판의 움푹 패인 동그만 구덕마다 밀가루 죽을 붓고 거기에 단팥 무더기를 한 숟갈씩 떠서 넣는다.

판의 뚜껑을 닫고 한참 후 뒤집어서 익히고 나서 뚜껑을 다시 열면 구멍마다 동그랗고 노리끼리한 먹음직스런 빵이 들어차 있다. 어린 눈에 주전자로 부은 밀가루 죽이 금방 빵이 되어 나오는 과정이 정말 신기할 따름이었다.

주인아저씨가 신문지로 만든 봉지에 빵을 담아주면 우리는 그 빵을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른다. 때로는 입천장이 데이기도 하지만 빵 속에 들어 있는 달콤한 팥죽이 터져 나와 입 안 그득히 맛을 채우는 순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사실을 고백하자면 내가 지금껏 먹어본 빵 중에서 가장 맛있는 빵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지금도 그 문화빵을 떠올리면 까까머리 철없던 시절이 그리운 모습으로 눈에 밟힌다.

친구는 몇 해 전에 부친을 여의었다. 아버지가 별세하자 그 슬픔에 마음이 울적해져 한동안 병원에 다니며 우울증 치료를 받은 일이 있다. 육친과 헤어진 슬픔이 잠시 마음의 병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도 마음이 여리다. 그리고 작년에는 모친이 돌아가셨다.

모든 사람들은 언젠가는 이 세상에서 부모와 작별하는 때가 온다. 나는 이런 일에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는다. 대체 태어나 죽어야 하는 이 짧은 인생의 여정이 무엇이기에 사람은 바둥거리며 기어코 살아내야만 하는 것일까, 하는 얼토당토않은 질문이 따라붙는다. 나는 막연히 답한다. 그것은, 팍팍한 인생 여정의 어딘가에 팥죽이 든 ‘문화빵’ 같은 무엇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나는 한 달에 한 번 친구 만나는 날이 무척 행복하다. 악수를 하고 헤어지면서 나는 말한다. “오늘 정말 행복한 날이었어. 다음 달에 또 만나자고.” 멀어져가는 친구의 차를 한참 서서 바라본다. 운전석에서 손을 흔드는 친구의 모습이 실루엣으로 보인다.

친구와 내가 나누는 우정에 무슨 열정이나 사랑 같은 것이 있다고 하기는 뭣하다. 말하라면 밍밍한 숭늉맛 같은 관계다. 나이가 들 만큼 든 친구 사이에 표 나지 않는 이심전심 같은 우정의 강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는 지구별에서 어느 한 옛 친구와 이렇게 아무런 감정적인 꼬임이나 부담없이 그야말로 서로를 응원하고 우애하는 관계는 내가 생각해도 행운 같다.

며칠 전 친구를 만났는데 얼굴이 좀 수척해 보였다. 봄 감기를 한 열흘 앓았다는 것이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친구를 걱정한답시고 “면역력이 약해져서 그래. 인터넷 뒤져서 면역력 강화식단으로 식생활을 하라고.” 그리고는 나는 덧붙였다. “우리가 오래오래 만나 점심을 같이 먹으려면 그래야 한다고.” 마치 내가 친구 가족이나 되는 것처럼 몇 번이고 강조했다. 진심을 담아 그래주기를 바랐다.

진정으로 아무런 마음의 흔들림 없이 서로를 위해주고 상대의 일을 내일처럼 염려하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라 할 것이다. 성서는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말한다. 우리 두 친구의 우정을 감히 그런 정도의 고결한 우정까지 치부할 수는 없겠지만 나이 들어가는 인생 여정 길에 옛 친구의 등장은 내게 더없는 기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헤어진 날 저녁에 나는 으레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잘 도착했는가? 건강하게 지내라고.” 우정도 남녀 간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잘 간수하려면 유리그릇 다루듯 해야 한다. 더구나 그 유리그릇에 옛 추억의 문화빵 같은 것을 담아두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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