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여행자에게
시간 여행자에게
  • 문틈 시인
  • 승인 2018.03.06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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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상대성원리를 묻는 어느 여성에게 “시간은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있으면 빨리 가고 뜨거운 난로 옆에 있으면 더디 간다.”고 시간의 특질을 간명하게 설명했다. 공간과 시간이 구부러질 수도 있다는 상대성 원리는 잘 이해할 수가 없지만 우리가 체험하는 시간은 확실히 빨리 가는 듯한 느낌이다.

엊그제 신년 달력을 걸었는데 벌써 3월 중순이 코앞이다. 시간은 책장을 넘기듯 지나간다. 시간의 속도는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에게서 달리 느껴진다고 한다. 과학자들은 뇌의 선조체 신경회로의 진동수를 조절하는 신경세포에서 들어오는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의 분비 양에 따라 시간의식이 달라진다고 설명한다.

어려운 과학적 설명을 제껴 놓더라도 지내놓고 보면 지난 10년은 금방 가버렸다. 다들 그렇게 느낄 터이다. 그 빠른 세월의 흐름을 오는 10년에다 대비해보면 다가오는 세월도 그렇게 찰나처럼 지나가버릴 것이다. 앞으로 10년이 지나면 당신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이 무심한 시간의 속도에 두렵기도 하고 떨리기도 하다.

“대체 이렇게도 빨리 지나가버리는 시간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그 무엇을 추구했더란 말인가”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지나온 반생을 회상해보면 이렇다 할 한 것도 없이 지내온 날들에 허무감마저 든다. “이러려고 긴 세월을 살아왔었단 말인가” 하는.

한 목숨 부지하려고 참으로 부지런히도 우왕좌왕 헤매 다녔던가 싶다. 중간 결산을 셈해보니 살아온 날들이 명예도 아니었고 부도 아니었고 그 무엇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시간은 가차없이 지,나,가,버,린,다. 안타깝고 슬프기조차 한 탄식이 나온다.

인간이란 의미를 추구하는 동물이어서 삶에 대한 의미를 찾지 못하면 우울하고 불안하고 좌절하기 쉽다.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시간이 빨리 가더라도 그 성취감으로 감내할 수 있을지 모른다. 산 정상에 오른 사람이 등반의 어려움을 외려 보람으로 삼듯이.

문제는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사람이 인생을 사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 아무리 이유 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살아가는 이유를 대라면 썩 어려운 일일 터이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는 ‘인생은 맹목’이라고도 말한다. 인생에 목적이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근거는 무너져 버릴 것만 같다.

구순의 어머니는 ‘살아 있으니까 사는 것’이라고 지혜를 빌려주시지만 나는 무엇인가 다른 것을 찾아보고 싶어 한다. 이유. 인간의 역사는 인문학적으로 볼 때 이유를 찾는 행로라고 규정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다가 의식이 깨어나고 문명이 발달하고 여기까지 왔다.

사르트르 같은 사람은 ‘인간은 내던져진 존재’라며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를 삶을 통해 만들어가야 한다.’고 선언한다.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거기에 삶의 답이 있는 것처럼 들려서 여기 혹해 젊은 날 열병을 앓듯 추종해본 일도 있다. 저항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랬건만 삶이란 살면 살수록 인생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동양의 선각이 가르쳤듯이 하늘에 순명하고 물 흐르는 대로 사는 무위자연의 경지가 삶의 궁극이라는 답이 더 친근하다. 나이가 들어서일 것이다.

생업에서 물러나 하릴없이 세월을 죽이다 보니 자주 삶에 대한 질문들을, 젊었을 때 했던 그 질문과는 또 다른 맥락에서 하게 된다. 생에 대한 탐구라고 할 것까지는 뭣하지만 기어이 알아내야 할 것만 같은, 그러나 영 삶의 이유를 밝혀볼 도리가 없는 벼랑에 당도하게 된다. 삶이란 그처럼 의문투성이다.

물 흐르는 대로 아무런 구애없이 허허롭게 살아가는 무위자연의 삶. 그 경지가 어떠할꼬. 욕망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군상들이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을까.

세상이 어지럽다 보니 이런저런 잡생각들이 물거품처럼 일어난다. 엊그제가 토요일이었는데 벌써 또 토요일. 자고 나면 토요일인 것만 같다. 나는 시간의 속도에 속수무책이다. 그냥 빈 바구니를 들고 날마다 어디를 헤매 돌아다니다 오는 기분이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고 했는데 그 말씀이 절실히 다가오는 요즘이다. 하루를 살더라도 진리를 깨닫고 참되게 산다면 당장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도저한 경지를 내 어찌 짐작이나 할 것인가마는 나이가 들어가고 보니 그 자리를 자주 상상해본다.

삶에 의미를 갖지 못한 채 백년을 산들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이런 말로 들린다. 무위자연으로 시간 속을 헤엄칠 수 있다면 시간 여행자의 삶은 의미를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이 빠르다고 한탄만 할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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