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멋을 찾아서(42) 광주무형문화재 제13호 화류소목장 조기종
남도의 멋을 찾아서(42) 광주무형문화재 제13호 화류소목장 조기종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8.01.23 17: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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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의 손에서 탄생한 천년의 화류목 가구
조선 목가구 중에서 최고 명품으로 통해

대목장은 목조로 집을 건축해 짓는 사람을 말하고, 소목장은 건물의 문, 창문, 장롱, 궤, 경대, 책상, 문갑 등 목가구를 제작하는 기술을 가진 목수를 말한다.

소목장 중에서도 최고급 소나무의 재료인 화류를 고집하며, 통가구에 연귀짜임 전통기법으로 충실히 전통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장인이 있다.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제 제13호 화류소목장(樺榴小木匠) 조기종(65) 장인을 만나기 위해 30여년이 넘는 세월동안 소태동에 자리한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조기종 장인의 작업실은 소태동 끝자락에 위치해 한적하고 주변이 고요해 작업에 집중하기 적합한 장소였지만, 목재가 많은 탓에 난방과 단열이 되지 않는 시설로 열악한 상태였다.

그나마 전수관과 공예전시장 등을 갖추고 있는 다른 무형문화재 장인들과 달리 전통의 맥을 이어가기엔 작업실이 열악해 화류소목장이 전수될 수 있는 별도의 장소지원이 필요해보였다.

전통 짜맞춤 기법으로 가구 제작

조기종 장인은 원목의 사용에서부터 끝마무리 과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정을 전통기법으로 제작하며, 풀칠이나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전통 짜맞춤 기법으로 목가구를 제작하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은 전국 유일 화류소목장인 조기종 장인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독특한 특징이다.

조기종 화류소목장은 14살 나이부터 목공일에 발을 들였다. 베이비붐세대보다 앞서 1954년에 태어났던 터라 모두가 어려운 시설이었다. 그는 기술을 배워보겠다는 다짐하나로 아버지의 추천을 받아 조춘훈으로부터 전통 목공일을 배우게 됐다.

그 당시는 6.25전쟁 이후로 작업실은 더욱 열악했고, 미군이 쓰던 텐트를 중고로 사들여 쳐놓고 일을 했다고 떠올렸다. 그는 한국 가구제작의 본산지인 서울에 가서 자리를 잡으면서 일을 배우게 됐다.

조기종 장인은 “왕십리에서 일을 배우면서 너무 어린나이에 목공일을 배운다고 하니 아무도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쳐다보지도 않았다”며 “목공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설거지, 빨래, 청소, 주방일을 했고, 처음에는 연장을 잡지도 못하게 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가구 제작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밤낮 구분 없이 쉬는 시간이 없을 정도로 기술자들의 곁에 머물며 어깨너머로 익히기 시작했다. 한번은 뼈가 보일정도로 톱에 발이 베여 피가 멈추지 않을 정도였지만, ‘집에 가면 다시 오지 말라’는 매정한 말 한 마디에 독하게 일을 배워야겠다고 다짐하게 됐다.

조 장인은 “아무도 순서를 가르쳐주지 않아서 어깨너머로 눈과 귀로 보고 듣고 난 후 기억을 해놨다가 저녁에 외우기 시작했다”며 “그렇게 하다 보니 몇 년을 거쳐 배워야할 것들을 2개월 만에 머릿속에 집어넣게 되면서 기술을 연마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당시 서울 왕십리, 을지로, 청계천, 종로 등 주변에 조기종이 매섭게 일을 잘한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광주에 터전 잡고 화류소목의 아름다움 알려

하지만 조기종 장인은 도안대로 해줘야하는 일에 머무르지 않고, 창작을 해서 나름대로 작품을 만들고 가구를 제작했다. 그렇게 23세 무렵 광주 지산동에 친누이가 거주하고 있어 광주로 내려와서 일을 해왔다.

1974년 광주 학동에 ‘한국 전통목공예가구연구소’를 차리고, 화류소목작업에 매진해 작품 전시회로 전통 가구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시작했다. 1975년에는 의제 허백련 화백의 사군자를 받아 장롱에 조각을 새긴 전통가구를 완성시켜 세간에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오지호 화백과의 인연을 떠올리며 “1981년 오지호 화백의 추천으로 남도예술회관에서 전시회를 열었는데 오지호 화백이 추천사를 써주셨다”며 “오지호 화백의 거처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가르침을 받으며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보존하는 작업에 큰 힘이 되었다”고 여한 없이 화류소목장으로 지내온 세월을 회고했다.

조 소목장은 원목의 결을 지워버리는 옻칠 대신 강하고 무거운 재질인 화류목의 무늬와 결을 살리기 위한 황칠을 연구해 작품에 입히고 있다. 1985년에는 소태동 자락에 작업실을 마련하게 되면서 줄곧 30여년이 넘는 세월동안 한 자리를 지켜왔다.

동양에서 최고로 여기는 화류목은 주로 중국 남방에서 자라는 나무인 터라 고가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화류목으로 모과나무를 쓰기도 했지만, 조 장인은 오래된 화류목을 고집해왔다. 집과 땅을 모두 담보로 전 재산을 쏟아 2000년이 넘은 화류목을 구할 정도로 열정이 남달랐다.

화류소목장 전통 기술, 명맥 이어가기 어려운 현실

그렇게 그의 전통 짜맞춤 기법과 빼어난 기술이 널리 알려지면서 1996년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3호 화류소목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받게 됐다. 10대 나이에 목공일을 시작해 50여 년 동안 연장을 쥐고 살았던 터라 그의 손은 거칠고, 성한 곳이 없었다.

조기종 화류소목장은 “화류목은 수령이 오래되고 무늬와 결이 고운데다 매우 단단해 화류목으로 짜맞춤한 가구는 1,000년이 갈 정도로 튼튼하다”며 “여기에 화류목의 원래 문양과 색을 살릴 수 있는 황칠을 이용해 최대한 투명하게 책상, 장롱, 문갑 등을 제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목공 일은 거친 연장을 사용하기 때문에 신체 일부가 절단되거나 장애를 입을 수 있는 터라 현재 화류소목장의 전통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며 “단절될 위기에 처해있다”고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그는 국내 유일의 화류소목장 기능을 이어갈 전수관 건립과 전통의 맥을 이어갈 전수조교를 길러낼 국가적 지원이 절실하다고 호소하고 있다. 천년의 세월이 넘게 존재할 화류목 가구를 제작하는 화류소목장의 전통과 우수성을 보존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지원이 이어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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