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정의롭고 관용하여’ 함께 가자(9)
더불어 ‘정의롭고 관용하여’ 함께 가자(9)
  • 이홍길 고문
  • 승인 2017.12.26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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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길 고문
이홍길 고문

1973년 1월호 「월간중앙」은 별책부록에서 「인물로 보는 한국사」 대담 프로를 게재하였다. 쟁쟁한 학자들인 홍이섭, 윤병석, 이광린, 유광열 등이 참석하였다.

한국사에 소개할 각 분야의 인물들을 거론하는 가운데 홍이섭 교수가 말하기를 “일제시대 민족운동 가운데 정신면에서 이 국어운동이 컸는데 한글운동의 대표로 한분 넣는 것도 좋지요. 같이 한글운동을 하다가 작고한 이윤재나 최현배, 김윤경, 모두 주시경 문하지요”라고 하면서 대표인물로 주시경을 추천하고 일제하 한글운동과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희생된 분과 연루자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사건 관계 연루자들이 33명이나 됨으로 모두를 소개할 수는 없지만 중심인물인 고루 이극로가 빠진 것이 안타까웠다.

일제는 이극로를 주모자로 주목하여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고문하여 7차례나 기절케 하고 8개월 동안 유치장에서 떨어진 독방에 수감하였다. 이에 대해 이희승은 “이극로는 조선어학회 대표라 해서 독방에 갇혔고 남보다 심한 고문을 당해야 했다”고 증언하였다. 어학회사건으로 연행된 최초의 피의자인 정태진은 “고루 이극로 선생님이 우리나라에서 한글운동의 제1인자이다”고 증언하고. 최현배는 “일신의 안일과 집안의 이익에 급급한 현대인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움을 극복하였기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이극로의 적극적 활동에 공감한 안재홍과 정세권 역시 조선어학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되며, 이들 모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고문을 당하였다.

이극로의 한글운동을 소개하는 글로 대종교 3대 교주 윤세복의 1935년 12월 18일의 편지를 소개한다. “신문지의 소개로 아우님이 백림대학에서 한글강좌를 열고 강의를 하였다는 것과 파리 악보에 한글음부를 넣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더구나 돌아온 뒤에 여러분 동지의 슬기와 힘을 합하여 이미 한글 통일안이 성공되고 더욱이 한글사전의 편찬을 앞두고 노력하시는 그 정성과 공덕을 기리나이다”고 하는 글은 일제하 이극로의 한글운동을 일목요연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극로는 어학회 연루자 중 가장 무거운 징역 6년의 판결언도를 받아 함흥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8월 17일에야 석방되었다.

개인이나 집단을 가릴 것 없이 삶은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우리들은 위기감을 느낀다. 몸부림치는 것만으로 문제가 바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문제 해결을 위한 자기 동력을 모으는 방법으로 ‘위기는 기회다’라는 검증되지 않는 말로 결의를 다지지만 위기는 파국의 씨앗이 될 수 있음 또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위기를 기회로 삼지 못하고 파국으로 치달렸던 현대사의 숱한 경험들을 우리들은 갖고 있다. 현실을 걱정하고 현실을 진단하는 것을 패배의식을 조장하는 것으로 땡중 염불하듯 질책하는 습관성 희망 전도가 오히려 절망을 조장한다면 억지이고 궤변이 될까?

어찌해도 위기를 돌파할 수 없는 현실에서 선택할 수 있는 출구는 어디일까를 가늠해 본다. 관념적으로 최선의 모범답안을 상정할 수 있다. 차선의 방법도 그런대로 꾸릴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함께 하는 일은 궁극적으로는 힘의 운동방향으로 결정되는데, 아전인수하는 일치하지 않는 인간조건들을 각 단체가 갖고 있다.

이극로는 1947년 조봉암, 안병무 등과 함께 좌우합작위원회를 중심으로 통일전선결성준비위원회를 구성했고 안재홍, 김병로, 홍명희 등과 함께 신민주노선의 민주독립당을 결성하기도 하고, 여운형이 암살당한 이후에는 김규식과 함께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는 남북 모두가 참여하는 국민투표를 통해 통일정부 건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해방정국 정치의 흐름은 분열로 가고 있었다. 우익에서는 ‘비상국민회의’, 좌익에서는 ‘민주주의민족전선회의’를 열었고, 이극로는 두 모임에 모두 참가하여 노력했으나 실패하자 조선어학회 성명을 통해 “최후의 성의를 다하여 조국건설에 천추의 한이 없도록 힘쓴 바인데(중략) 통일의 목적을 달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본회 대표 이극로는 민족분열 책임을 지지 못하겠으므로 비상국민회의와 민민전 결성대회는 탈퇴함”이라 발표하고 학구로 돌아섰다. 이후 초등학교 의무교육제도 실시에 크게 공헌하였는데, 훗날 북한에 남아 1978년 작고,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오늘의 촛불정국을 생각하며 이극로가 1942년 3월 3일 작사한 한얼 노래의 일절인 “촛대에 타고 있는 초들을 보라. 제 몸은 사라져서 희생이 된다. 그러나 어둔 것을 물리쳐내고 광명한 좋은 세계 이루어진다. (후렴) 희생은 깨끗하고 거룩하구나. 하나의 희생으로 여럿이 산다. 희생이 없는 곳에 발전이 없고 희생이 있는 곳에 광명이 있다”를 부기하여 희생이 거듭남의 밑바탕임을 상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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