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호남 선비,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강항(7)
길 위의 호남 선비,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강항(7)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7.12.26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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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군 내산서원 유물전시관에서 마지막으로 본 전시물은 ‘귀국 후 강항 선생’이다. 1600년 2월 6일에 도도 다카토라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부름을 받고 후시미성에 왔다. 강항은 일본어를 아는 대구 선비 김경행을 시켜 귀국 요청 글을 다카토라에게 보냈다. 왜승 경안(慶安)도 다카토라에게 강항의 귀국을 거듭 부탁했다. 그제야 다카토라는 허락했다.

강항 일행은 모은 돈으로 배 한척과 식량을 준비했다. 그리고 세이카와 히로미치를 만나 귀국 편의를 부탁했다. 히로미치는 통행증과 뱃길에 익숙한 사공을 딸려주었다.

드디어 4월 2일에 강항 일가와 선비들 38명은 후시미성을 떠나 귀국길에 올라 대마도를 거쳐 5월 19일에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 도착하자 선조는 강항을 불렀다. 적중 사정을 알아보고자 한 것이다. 6월 9일에 강항은 선조를 뵙고 왜국 사정을 알렸다.(1600년 6월9일자 선조실록 참조) 이후 강항은 서울에 머물면서 승정원과 예조, 비변사 등의 자문에 응했고, 8월 1일에는 선조로부터 술과 말 한필을 하사받았다.

9월초에 강항은 고향인 영광군 유봉마을에 돌아왔다. 그리고 72세의 부친 강극검에게 큰 절을 올렸다.

1601년에 강항은 4도체찰사 이덕형 막하에서 『예부절왜서(禮部絶倭書)』를 초하였다. 그가 왜국의 정세에 밝았기 때문이다. 1602년에는 대구교수로 발령을 받았으나 부임했다가 곧바로 돌아왔다.

1607년(선조 40년)에 조선은 일본의 요구에 의해 회답 및 쇄환사를 파견했다. 정사는 여우길, 부사는 경섬이었다. 귀국 후 여우길은 “왜인들이 강항이 무슨 벼슬에 있느냐고 묻고 충의와 절개가 대단하다고 칭송했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이는 경섬의 『해사록』에 전해진다.

1608년에 김장생은 병조판서 이정구에게 강항의 천거를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 당시 김장생은 북인들의 세도에 눌려 연산에 은둔해 있었고, 이정구는 서인이지만 소북파 영수인 유영경과 친하여 유영경이 영의정이 되자 병조판서를 하고 있었다.

김장생의 편지가 효과가 있었던지 강항은 순천교수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강항은 부임하지 않고 후학을 가르치는 데만 전념하였다. 1)

이제 유물 전시관을 나와 내산서원으로 간다. 사당 용계사에는 강항과 제자 윤순거(1596∼1668)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1609년에 윤황이 영광군수로 부임했다. 윤황은 우계 성혼의 사위이고 강항은 성혼의 문인이어서 서로 막역한 사이였다. 윤황은 아들 윤훈거 · 윤순거 형제를 강항 문하에서 수학케 했다. 당시 윤순거는 13세였다.

내산서원
내산서원

 

용계사
용계사

다음으로 간 곳은 묘소이다. 묘소에는 강항과 부인 김씨와 이씨가 모셔져 있다. 향리에 살면서 강항은 광주향교 상량문과 임진왜란 의병장 김천일 · 윤진 행장 등을 지었고, 현덕승과도 교류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1593년 7월에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약무호남 시무국가’란 글귀가 적힌 편지를 보냈다.

한편, 1615년에 부친을 여윈 강항은 1618년(광해군 10년)에 별세했다.

강항 묘소
강항 묘소

강항은 왜국에서의 일을 모은 문집을 『건차록(巾車錄)』이라 했다. ‘건차’란 본시 죄인이 타는 수레로서 강항은 스스로를 죄인으로 자처한 것이다. 그런데 제자 윤순거가 소무(蘇武)의 고사를 인용하여 『간양록(看羊錄)』이라고 고쳐서 1658년에 발간했다. 2)

홍문관 교리 유계(1607∼1664)는 『간양록』 서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공 같은 고절과 애끓는 심정을 세상에 널리 알려 이를 표창해주기는커녕 도리어 깎아내리고 매장하여 들었으니 천하에 이런 일도 있단 말인가. 이건 너무도 심한 말이다. 그러나 다행한 일은 이 기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니, 공심(公心)을 가진 자가 이 글의 참뜻을 안다면 백년도 못되어 시비의 논의는 결정되고 말 것이다.”

그랬다. 당쟁의 화(禍)는 귀국 후 강항의 삶 18년을 질곡으로 몰았다.

2018년은 강항 선생이 별세한 지 400년이 되는 해이다. 그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길 기대한다.

1) 강항이 1608년에 순천교수로 명받은 사실은 윤순거의 「강항 행장(1628년)」에 의한다. (『국역 수은집』참조). 『간양록 (이을호 번역)』에는 1603년에 순천교수로 명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2) 소무는 한나라 장수로서 흉노 정벌에 나섰다가 포로가 되어 바이칼 호수 근처에서 19년간 양을 치는 수모를 겪었지만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한편, 『간양록』은 일제 말에 일본 경찰에 의해 분서(焚書)의 화를 입었으나 다행히도 필사본이 보관되어 1952년에 이을호에 의해 국역되었다.

(강항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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