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호남 선비,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강항(6)
길 위의 호남 선비,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강항(6)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7.12.18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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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내산서원 유물전시관에서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후지와라 세이카’ 전시물을 보았다. 일본 승려 후지와라 세이카(1561∼1619)는 강항(1567∼1618)을 스승으로 모시고 주자학을 배웠다.

강항과 세이카와의 만남은 『간양록』 ‘적중문견록’에 나와 있다.

"소신(小臣)이 교토에 온 다음 일본의 허실을 알기 위하여 때때로 일본인 승려와 접촉하였습니다. (중략) 묘수원(妙壽院)의 중 순수좌(舜首座)라는 자가 있는데, 적송광통의 스승으로 총명하여 옛글도 잘 알고 글에 통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후지와라 세이카

이 글에서 순수좌가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이다. 그는 이름을 숙(肅)이라 했으며 호는 세이카(惺窩)이다. 그의 호 세이카(惺窩)는 강항이 그를 위해 쓴 ‘성재기(惺齋記)’에서 ‘성’을, ‘시상와기(是尙窩記)’에서 ‘와’를 따온 것이다.

세이카는 1590년 조선통신사로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일행이 교토에 왔을 때, 서장관 허성과 접촉하면서 조선유학에 대해 감명을 받았다.

세이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도 인연이 있었다. 이에야스는 1593년에 에도에서 세이카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이 때 세이카는 당나라 태종의 정치를 논한 『정관정요』를 강의했는데 이에야스는 상당히 감명을 받은 것 같다.

이어서 ’후지와라 세이카와의 왕복 서신’ 전시물도 보았다. 서신을 읽어보자.1)

"저 후지와라가 생각하건대, 그 대 강 선생은 조선의 관리로서 뜻하지 않게 일본으로 붙잡혀 왔습니다. 만일 일이 잘 된다면 본국인 조선으로 되돌아갈 수 있겠지요. 자신의 고향을 잊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불행히도 일본에 머물러야 한다면 그대 스스로 생계를 꾸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생계의 어려움은 그리 걱정하지 마십시오. 옛날 중국 제나라의 도정백이란 사람이 조정의 사자에게 두 마리의 소를 그려 주었습니다. 그 의미는 누구도 모릅니다. 당신도 이 뜻을 알아 염려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더더욱 이국인이기 때문이잖습니까?"

후지와라 세이카와의 왕복 서신

세이카는 주자의 시를 병풍으로 써 달라는 하리마(현 효고현 서남부에 위치)영주 아카마쓰 히로미치(赤松廣通, 1562∼1600)의 부탁을 받아서 강항에게 글씨를 써 달라고 했다.

그런데 강항은 세이카에게 글씨 쓰기를 좋아 하지도 않을 뿐더러 솜씨도 하찮다고 사양했다. 그러자 세이카는 ‘강항의 솜씨가 좋으며 다만 겸손한 것뿐’이라는 히로미치의 말을 듣고서 강항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 결코 사양치 말라고 한 것이다.

이를 보면 영주 히로미치는 강항의 적극적인 후원자였다. 일본 학계에서는 세이카 · 히로미치 · 강항을 ‘에도 유학 탄생 3인방’이라고 부른다.

이어서 ‘일본 주자학 경전’ 전시물을 보았다. 여기에는 강항이 발문을 썼다는 사서오경이 전시되어 있다.

일본 주자학 경전

세이카는 강항을 비롯한 10명의 조선인 유학자에게 사서오경을 베끼게 하고, 자신이 직접 왜훈을 붙였다. 이 책이 바로 사서오경에 대한 주자의 집주에 일본식 훈을 단 『사서오경 왜훈(四書五經倭訓)』이다.

한편, 세이카는 강항이 1600년에 귀국한 후에도 주자학에 심취했고, 4천왕이라 불리는 수제자들, 즉 하야시 라잔과 마츠나가 세키고 · 호리 교안 · 나와 가츠쇼를 키웠다.

그의 제자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이는 하야시 라잔(1583∼1657)이다. 라잔은 1605년에 세이카의 추천으로 이에야스에게 발탁되어 슨푸성의 서고관리 담당자로 임명되었고, 히데타다(1605년), 이에미쓰(1624년), 이에츠나(1655년)의 에도 막부에서 4대 째 대학두(大學頭)로 일하여 ‘사상계의 쇼군’이라 불렸다.

에도 시대 이전까지 일본은 무(武)와 불(佛)의 나라였다. 그런데 에도시대는 무(武)의 사무라이가 유문(儒文)을 읽었다. 즉 문(文)을 통하여 사무라이의 신분 질서가 확립되어 에도 시대 270년 동안 태평성대가 이어졌다.

문(文)의 사무라이를 확립시킨 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였고, 사상적으로 뒷받침 한 이는 일본 근세 유학의 비조(鼻祖) 후지와라 세이카였다. 그리고 세이카 뒤에는 조선 선비 강항이 있었다.

1) 전시관에는 왕복서신이 일부 번역되어 있다. 2010년 국립진주박물관 발간 『임진왜란 조선인 포로의 기억』이란 책에 서신 전체가 번역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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