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후 생긴 잔소리 '주체적으로 살라'
결혼 후 생긴 잔소리 '주체적으로 살라'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3.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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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찾았던 광양 매화마을에서 맞이한 바람결에는 매화 향기가 묻어나고 있었다. 코를 갖다 대지 않아도 어느 새 바람이 봄향기를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결혼한 지 이제 5개월째. 저절로 때가 되어 꽃망울을 터트리는 봄처럼 내 결혼생활도 저절로 향기가 생기면 좋으련만 아직은 모든 것이 서툴기만 하는 신혼생활이다.

영화 '러브스토리'를 보면서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었는데, 그 장면은 주인공인 올리버와 제니가 올리버의 기숙사방 안의 긴 의자에 누워 각자 책을 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편안한 휴식, 거기다 교양있게(?) 책을 읽으며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장면이 내게는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제 결혼을 했고, 나도 한번 남편과 책을 읽으며 편안한 휴식 시간을 가져볼까 하는데, 결혼을 하니 영화속에 보이지 않던 여러 장애물이 하나둘 생긴다. 그것은 바로 집안일이다.
"좀 주체적으로 사세요. 불도 내가 끄고, 텔레비젼도 내가 끄고,……"
결혼하고 나서 남편에게 자주 하는 잔소리 중 하나가 '주체적'이란 말이다.

외출시 뒷마무리는 항상 내 차지
설겆이, 빨래 등 가사부담까지
함께 휴식하는 평범한 부부이고 싶다


남편과 외출을 하려고 하면 마지막 마무리는 항상 내 차지가 되는 것이다. 그 마무리라는 것이 별건 아니다. 켜져 있던 실내등과 텔레비젼을 끄고 창문이 잘 잠겨져 있나 확인하는 것인데 그게 늘 내 몫이 되는 것이다. 물론 외출 준비는 남편이 먼저 마치는데도 말이다.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다 보면 외출준비로도 바쁜데, 늘 마무리 집단속까지 내 차지가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그 불만이 '주체적으로 살라'는 충고아닌 충고를 하게 되는 것이다.

결혼전 남편은 가사분담에 대해 대단히 호의적이고 맞벌이 부부에겐 당연한 것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 요즘 젊은 남자들 중 정말 깨어있는 사람이 많다더니 내가 만나는 남자가 그런 남자이구나 싶어 내심 얼마나 흐뭇했던지……. 그러던 것이 결혼 5개월째에 접어든 요즘 차츰차츰 무너지고 있다. 물론 남편은 내가 늦게 오면 설거지도 하고 밥도 하고 가끔은 김치찌개도 끓이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늘 그에게서 느끼는 것은 그가 집안일을 하는 것은 '내 일'이여서가 아니라 '아내 일'인데 아내가 특별한 사정으로 바쁘니 잠시 '도와주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곤 한다. 남편은 그런 내 느낌에 대해 다소 억울해할 지 모르지만.

진정한 가사분담이란, 공동의 책임감을 가지고 집안 일을 함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남편은 내 빈 자리가 느껴질 때만 집안일을 할 뿐, 내가 집에 함께 있으면 도통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내가 없으면 세탁기를 돌리기도 하는데, 나는 함께 있을 때 남편이 능동적으로 세탁기를 돌리는 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다. 욕실에는 빨래감이 넘쳐나는대도 말이다. 그러다보니 내 불만은 잔소리가 되어간다. 그리고 자꾸 남편에게 이거 하라 저거 하라고 시키게 된다. 남편은 너무 많이 시킨다고 불만이다. 나는 시키기 전에 남편이 우리의 일로 인식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집안 일이 남편의 눈에도 좀 보이면 얼마나 좋을까…… 한숨을 쉰다.

내게 작은 소망이 있다면,
공동체 터전인 이 가정을
공동의 주체자로 꾸려가는 것


결혼하니 아내가 되었고, 며느리가 되었고, 아마 엄마도 될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 중에서 엄마 아빠가 되기 전, 내게 작은 소망이 있다면, 남편과 나의 공동체 터전인 이 가정을 함께 공동의 주체자로 꾸려가는 연습을 마치는 것이다. 내 할 일 너 할 일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이 우리의 앞에 주어져 있다는 것을 함께 인식할 수 있는 평범한 부부가 되는 것이다. 이런 내 소망이 평범하지 않은 것이라면, 아마 내가 꿈꾸는 행복은 다소 모양이 구겨질지도 모르겠다.

결혼하고 나서 깨달은 것은 남편이 가사일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아내의 중요한 일중 하나라는 것이다. 신혼초 가사분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부부라면, 육아문제도 별반 다를 것 없이 아내의 몫으로 규정되고 아내의 희생과 헌신만을 고집하는 일이 앞으로 벌어질 것이다.

결혼생활 첫발걸음을 뗀지 얼마 안된 우리에게는 상대방을 배려하고, 이해하고, 이해시키는, 시간이 여유가 있을 듯 싶어 마음이 다소 가볍다. 다행히(?) 우리는 아직 거실에 소파가 없다. 그래서 소파가 생길 때까지는 러브스토리의 장면을 재현하기가 힘들 것이다. 그 어느 날 우리집에 소파를 들이고, 내가 꿈꿨던 긴 소파에서 남편과 내가 책을 읽으려 할 때, 우리는 아주 편안한 휴식 시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그동안 결혼생활을 꾸려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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