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앞에 당당해지기
세상 앞에 당당해지기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3.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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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키고 느낀 한부모의 현실.
하나-"반배정표에 부모 이름과 아이 이름을 나란히 적어 놨는데 우린 아빠 대신 엄마 이름이라며 특별하게 '모'라고 덧붙임을 해놨더군요"
둘-"애들 주소록이 나왔는데 다른 애들은 보호자 성명이 게재되었는데 우리 상수만 그 칸이 빈칸이더군요"

이같은 상황에서 여느 한부모는 혼자라는 사실이 아이에게까지 부끄럽게 만든다는 생각에 얼굴이 붉혀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정혜인씨(40)는 교감에게 전화를 걸어 "작은 부분부터 배려할 줄 모르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무얼 배우겠느냐"며 "다수가 불이익 당하는 게 아니라면 굳이 이런 일로 아이에게 상처줄 필요는 없지 않냐"고 말했다. 그 뒤로 이 학교 주소록엔 보호자 성명 게재란이 없어졌다. 정씨도 '움직이는' 학교에 고맙다는 인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이것이 정씨가 한부모라는 한계를 넘어 당당히 살아가는 방식이다. 사람을 육성하는 학교 안에서 아이들 눈에 비춰지기에 부당한 일이 벌어진다 싶으면 정씨는 참을 수가 없단다. 주변 사람들은 "상수 엄마가 그렇게 해도 학교 비리는 언제나 도사리고 있으니 소용없는 일이다"며 그만 하라고 만류하지만 그 때마다 정씨는 그들에게 "이런 활동들이 곧 내 자신과 아이 앞에서 똑바로 설 수 있게 하는 힘"이라고 강조한다.

내가 똑바로 설 수 있는 힘
무너지는 학교 바로 세우는 일


정씨 남편은 상수 돌이 되기 보름 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10여년동안 정씨는 홀로 상수를 씩씩하게 키우고 있다. "흔히 한부모라 하면 사회에서 받는 불이익이나 편견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가정 환경 조사서를 작성해 오라고 해도 마치 아빠가 있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어요"

그러나 엄마부터 움츠려들고 숨기려하면 아이도 엄마를 닮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정씨는 상수 앞에서 더욱 당당해지려 노력한다.
아이가 학교 교사에게 언어 폭력을 당하고 '죽고 싶다'는 말까지 할 때 정씨는 아이를 위해 거대한 학교와 싸웠다. 또, 아이들에게 보다 나은 급식업체를 선정해 주기 위해 아이들의 불이익을 생각해 선뜻 나서지 못하는 학부모들을 대신해 총대를 메기도 했다.

하지만 무조건 학교와 싸우는 것이 정씨가 생각하는 학부모의 상은 아니다. 돈봉투 없이도 언제든지 교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 차 한잔 얻어먹고 나올 줄 아는 여유, 빼빼로데이라고 문구점에서 1천원짜리 큰 빼빼로 하나 사들고 학교를 찾는 뻔뻔함(정씨 스스로 자신을 이렇게 표현한다), 학교 행사가 있는 날이면 취미로 배웠던 사진 기술을 발휘해 누가 부탁한 적 없는데도 학교 자료 사진을 남기기도 한다.

주위에서 이런 정씨를 '치맛바람'이라고 보는 사람은 없다. 한부모로서 솔직하고 떳떳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질 뿐이다. 상수 역시 정씨가 하는 일은 "무너지는 학교를 바로 세우는 것"이라며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

상수를 임신했을 당시만 해도 정씨는 아이를 왕자처럼 키울 생각이었다. 그러나 29살이란 젊은 나이에 가장 소중한 사람을 떠나 보내면서 정씨는 값진 선물을 받았다. 상수와 둘이서도 당당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내가 외치지도 않으면서 한부모에 대한 편견부터 없애 달라고 하는 것은 이치에 안 맞죠. 사회에서 동성연애나 커밍 아웃, 성전환에 대해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 것도 그들이 직접 나서서 이야기 했기 때문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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