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이문열, 김용옥 때리기'
강준만의 '이문열, 김용옥 때리기'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10.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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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옥 유뉴스 기자

이문열-문화 특권을 이용, 지식 폭력을 행사하는 '대표' 정치적 문화권력
김용옥-뒤엎으려던 권력, 역으로 행사하는 '왕따' '지식대중화'공로는 인정

   
▲ 이문열과 김용옥 ⓒ인물과사상
할리우드 영화는 재밌다. 수려한 용모의 배우, 화려한 액션 장면과 발빠른 카메라 워크, 귀에 착착 감기는 음악에다 최첨단 컴퓨터그래픽까지.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그냥 앉아만 있으면 거대한 쇼가 이어지고 감동까지 전해준다. 말 그대로 킬링타임용으론 제격인 셈이다. 그러나 2시간을 신나게 보내고 나서 한국인은 말한다. "뭐야, 남는 게 없잖아!" 그렇다. 한국인은 그저 ‘쉬운’ 영화에 ‘쉽게’ 별 5개를 달아주진 않는다. 머릿속에 남는 지적인 포만감은 재미와는 별개이기 때문이다.

지식폭력과 문화 특권주의

사람들은 지식과 교양에 목말라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지식은 그 실질적인 의미의 지식이기 보다 ‘보여주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좀더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고, 이왕이면 영어와 한자를 섞어 말해야 식자(識者)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넘버 3’의 불사파를 기억한다. 쌈마이들까지 문자(文字)쓰기에 덤벼드는 판국이다. 『이문열과 김용옥』에서 강준만의 논의는 여기에 닿아있다.

이른바 ‘지식폭력’이 난무하는 사회라는 것. 지식폭력은 삶의 실질과는 무관하거나 큰 관계가 없는 현학적 지식 또는 제도적 지식 자격증으로 그걸 갖추지 못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그 고통을 그들의 책임으로 돌리게 만드는 ‘상징적 폭력’을 의미한다. 즉, 같은 말을 해도 서울대 출신 학자의 이야기가 지방대 출신보다 더 설득력 있어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곧 우리 사회 내 암묵적으로 성립된 헤게모니와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문화 특권주의’는 이러한 지식폭력을 전제로 군림한다.
저자는 문화 특권주의란 "문화 분야 종사자들이 정치경제 분야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권리는 누리면서도 책임은 지지않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회적 정서"라고 설명한다.

무책임한 정치 발언은 ‘부실한 개그’

이문열은 바로 그 정점에 위치한다. 그는 지난해 2월에는 총선연대를 ‘홍위병’에 빗댄 칼럼으로 논란을 빚더니, 지난 7월엔 국세청의 탈세 혐의 언론사에 대한 검찰 고발 발표를 생중계한 방송사들을 “나치의 대국민 선전선동을 연상시킨다”라는 발언이 물의를 일으켰다. 또한 추미애 의원과의 논쟁을 다룬 단편소설 '술 단지와 잔을 끌어당기며'를 현대문학 10월호에 발표하면서 또 한번 주목을 끌기도 했다. 강준만은 이문열씨의 무책임한 정치적 발언들이야말로 ‘부실한 개그’라 표현하며, 문화 특권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지적한다.

인물의 단순 정치비평을 넘어, 권력을 작동시키는 문언유착의 문제를 끌어내며 극우 언론과 문학계 전체의 모순점을 신랄하게 파헤친 데에서, '당당한 공적 지식인'을 부르짖어 온 강준만의 노력은 계속된다. 양쪽 다 성공 이데올로기를 추종하는 권력이긴 하나, 이문열이 "문화특권을 이용하여 지식폭력을 행사하는 정치적 문화권력"이라면, 김용옥은 "지식폭력과 문화특권의 전복을 시도하는 유사종교적 문화권력"이란 점에서 다른 편에 선다.

지식의 대중화에 주목해야

일단 이문열에 비한다면, 저자는 김용옥에게 훨씬 관대한 평을 내리고 있다. 즉, 학자들만의 성역이던 지식에 대해, ‘지적 엔터테인먼트’를 자처하며, 대중화·민주화를 위해 힘쓴 점 만큼은 인정해줘야 한다는 것. 그러나 김용옥은 자신이 뒤엎으려던 권력을 역으로 행사하는 딜레마에 빠지고 만다. 김용옥이 KS마크(경기고-서울대)가 즐비한 집안에서 왕따를 당하던 처지를 오히려 ‘하버드’로 누르며, “9단이 9급하고 바둑을 둘 수 있느냐” 따위의 권위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분명한 ‘지식폭력’이라는 주장이다.

외국의 예를 들어 사회를 설명할 때, 늘 듣게 되는 반론은 우리 나라의 ‘특이성’이다. 식민지배 하에서 이루어진 근대화와 독재정권, 급속한 경제성장 등 숨가쁜 역사는 현재 ‘비정상’이 ‘정상’으로 통용되는 사회로 만들었다. 서울대를 꼭대기로 하는 학벌 중심주의와 각종 인맥, 비뚤어진 패거리 문화는 이미 당연한 한국의 모습인 것이다. 정상이 제자리를 찾아가도록 하는 시도, 비정상적인 문화 특권주의와 지식폭력을 타파하려는 강준만의 시도는 “명랑사회 건설”에 있어 아직 유효하다

/안기옥 기자 ako7157@press.cau.ac.kr(유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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