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한장 떨어질 때 하늘 한 뼘 열리는 피아골 가을
낙엽한장 떨어질 때 하늘 한 뼘 열리는 피아골 가을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10.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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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은 핏빛 전쟁의 상처가 흥건히 고여있는 곳이자 단풍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우리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피아골이란 이름이 척박하고 물이 없는 산지 조건에서 옛 곡물중의 하나였던 '피'를 재배했던 밭이 있던 골짜기 즉, 피밭골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고 나면 피아골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삶의 질척함 속으로 더 파고들 수 있다.

전쟁이나 단풍 등 그저 몇 조각의 기억에 의해 이미지만 강조되는 이 땅의 개념이 못내 아쉬운 일이지만, 한 장의 낙엽이 떨어질 때마다 파란 하늘이 한 뼘씩 열리는 이 가을 그 피아골에 가슴 활짝 열고 발길 주길 바란다.
지리산이 지녔던 저항과 도전의 역사에서 지리산 자락의 어느 골짜기인들 자유로웠을까마는 피아골 윗자락 농평마을은 그런 한과 응어리를 풀고 자연과의 화해, 인간과의 화해를 통해 새로운 삶의 대열에 들어서 있음이 확인되는 마을이다.

구례군 토지면 연곡분교의 맞은편에 있는 산길을 따라 4킬로 정도 올라야 만날 수 있는 농평마을. 고도가 600미터에 이르는 이곳은 다섯 가구에 열댓 명이 하늘을 지붕 삼아 살고 있는 곳이다. 그곳에 이르는 길의 경사가 족히 30도는 되어 걷는 이들은 숨을 헉헉거릴 수밖에 없지만 마지막 언덕을 차고 올랐을 때 보이는 몇 채의 집과 계단식 논은 거친 호흡과 속옷 적시는 땀의 흥건함을 갑절은 보상해주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우리네 삶의 주변에 깍두기 같은 집이 들어서면서 우리는 절로 보이던 경관 대부분을 잃어버렸음에 통분했으며, 그 사람냄새, 연기냄새를 그리워하지 않았는가?.

참취
마침 이곳에는 하늘과 산, 바람, 구름, 안개, 지붕의 선(線)이, 구수한 사람의 냄새와 더불어 고스란히 남아있으며, 3천여평의 다랑치 논이 다도해의 섬처럼, 섬진강의 징검다리처럼 정겹게 길손을 맞아주고 있다.
게다가 길섶에는 물봉선화, 여뀌, 며느리밑씻개·배꼽·밥풀, 참취, 미역취, 쑥부쟁이, 구절초, 수크령, 고마리, 쥐손이풀 등 헤아리다간 날이 샐 법한 들꽃들이 손사래를 쳐주는 풍경이 함께 한다.

지금의 우리에겐 너무나 작은 마을이지만 6·25전쟁 전에는 20여가구가 넘었던 마을이었다. 모진 전쟁으로 모두 불에 타고 다시 마을이 들어선 후 지금은 다섯 집이 옛 역사를 잇고 있다. 그중 두 가구는 하늘에 기대 농사를 짓고 있으며, 다른 세 가구는 민박을 하면서 가축과 벌을 키워 삶에 필요한 것들을 바꾸며 살고 있다.

고도가 어지간한 곳에서는 유실수 재배와 약초 채취로 짭짤한 수확을 올리지만 이 마을의 자연은 이런 재배를 허락해 주지 않는다.
높은 고도는 유실수 재배가 어려운 조건이라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지만 약초가 나지 않는 점은 궁금할 터이다. 사실 우리네 약초라는 것이 세찬 북풍을 맞아야 그 효능이 있는데 농평은 병풍 같은 뒷산이 바람을 죄다 막아주고 있기 때문에 약초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따스한 기운이 농평의 산야를 온통 꽃밭으로 만들어 벌들의 천국을 이루고 있으며, 하늘에 기대어 농사를 일구었던 사람들의 생명과 같은 다랑치 논이 가장 높은 고도에서 황금빛 섬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거기에선 일어나도 산이고 누워도 산이다. 산 말고는 고개 둘 곳 없는 농평에서 지리산의 가을, 사람의 가을을 한껏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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