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향 호남 77인의 행적을 모신 오산 남문 창의비
의향 호남 77인의 행적을 모신 오산 남문 창의비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9.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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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자리는 벌써 가을을 찾아가고 있는가보다. 장성 북이면 사거리의 "오산 남문 창의비"를 찾았을 때 만난 비를 가을을 재촉하는 비라고 단정해 버린 것이 좋은 증거이다. 뿐만 아니라 "오산 남문 창의비"를 기억해내어 찾은 것 자체가 이미 나는 가을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400여년 전 이곳은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자 모였던 곳이다. 그래서 나는 아마도 옛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씨에 닿아 가을처럼 물들고 싶었는지 모른다.

어지러운 세상 목숨 버린
의향 호남 77인 실천가 모신
백양사 가는 길섶, 신흥, 모현리…


오산 남문 창의비가 세워진 것은 순조 2년인 1802년의 일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왜군의 발자국이 어지러웠을 때 장성 사람 김경수를 중심으로 인접지역인 고창, 흥덕, 담양, 정읍, 무안, 나주, 고부, 무장, 부안, 광주, 순창, 전주, 남원 사람들이 한 마음 한뜻으로 모여 의병을 일으켰던 것을 기억하고자 비를 세웠던 것이다.

창의의 주역 오천 김경수는 세 차례에 걸쳐 의병을 일으켰는데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에 장성현의 남문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1,651명의 의병과 500여석의 군량을 가지고 북상하여 용인과 직산 등지에서 싸움을 하도록 하였고, 1593년에 2차 836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가지고 진주성 싸움에 참여시켜 그의 두 아들을 포함하여 모두 순절하는 비운을 만나기도 했다.

모현리에 있는 77인의 위패를 모신 사당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백양사의 승려들과 천여명의 민간인을 모아 3차 남문 창의를 하여 안성에서 싸웠다. 그들의 이런 의로운 행적과 77인의 이름이 높이 168cm, 폭 63cm의 비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성인의 키 만한 비석의 귀퉁이를 보면 귀가 나간 흔적을 만난다. 관리인 정흠채씨에 따르면 일제 시대 일본경찰이 항일 의식을 부여할 수 있는 유적이라고 생각해 총을 쏘아 훼손하려 했다는 것이다. 일제는 당시 그보다 더한 일을 꾸미곤 했다. 남문 창의비가 있는 이곳의 국도 1호선 큰길을 다른 방향으로 옮겨 버린 것이다. 길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철로를 놓아 창의비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과 동선을 다른 쪽으로 돌려버린 것이다.

마을 안쪽 귀퉁이에 누구의 시선과 아랑곳하지 않고 서 있는 그 비석을 보고 다시 신흥쪽으로 가다 모현리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이분들을 모신 사당 모현사가 있다.
좁은 길목을 타고 들어서는 모현리의 사당은 너무나 검박하게 자리잡고 있다. 모현마을의 가장 안쪽에 있는 듯 없는 듯 자리하면서 77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것이다.

그곳에서 잊혀졌던 義를 찾아오자

잠시 그 분들을 추모하는 상념을 담고 길을 나와 원래 장성 남문이 있었다는 신흥의 뜨락에 서서 온갖 의복과 곡식과 철기구를 내 놓기 위해 줄을 서 들판에 먼지 펄펄 날리면서 땀흘렸을 그 때 그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죽어야만 의병이었다는 호남 사람들, 그 정신은 언제나 꺾이지 않아 구한말의 의병운동에도 이 지역이 가장 많은 의병을 낳았다.

의향 호남의 크낙한 뿌리 하나, 그곳은 우리와 동떨어진 곳이 아니라 바로 흔하게 가는 길목 백양사 가는 길섶의 사거리 마을과 신흥의 뜨락과 모현리에 있었다.

비록 화려한 간판이나 치장하나 없지만 이 어지러운 세상에 의향 호남의 실천가들이 있었던 그곳에 찾아가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의를 찾아 올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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