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무등경기장 - 광주 가슴 때리는 함성
13.무등경기장 - 광주 가슴 때리는 함성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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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 환호, 희열….

무등경기장에 가면 짜릿함을 느낄 수 있다. 무등경기장은 체육인들만의 것이 아니다.
전라도 사람치고 억지로라도 무등경기장을 한번쯤은 안가본 이들이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스포츠 메니아들에게 무등경기장은 인생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오늘까지 무등경기장은 단순한 운동장이 아니라 정치적 공간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해태타이거즈가 연고지 이전을 추진하고 결국 기아타이거즈로 이름을 바꿔달기까지 지역민들이 보여준 반응이 그 반증이다.

오죽하면 광주시는 물론 정권핵심에서 민심이반을 치유하는 차원에서 해태타이거즈의 연고지 유지와 새 인수기업 물색에 나섰겠는가.



한국전 당시 피난민촌 자리
65년 전국체전 위해 건립
80년대 프로야구 응원땐
'목포의 눈물' '도청'부르며 환호
전라도 희노애락 함께 한 현장


실제로 그랬다. 1982년 1월31일 창단한 해태 타이거즈는 광주시민과 함께 희노애락을 함께 했다. 80년 '진압'의 아픔을 이심전심으로 '목포의 눈물'을 부르며 달랬으며, "해태" "해태"라고 외치던 구호가 어느새 "도청" "도청"으로 변하더니 자연스럽게 "김대중" "김대중"으로 옮겨갔다. 이쯤되면 이른바 '스포츠는 독재정권의 3S정책의 산물'이라는 말은 설 자리가 없다.

여러 가지 원인도 있지만 정권교체이후 해태 관중이 예전같지 않게 줄어든 것도 어쩌면 이같은 영향일지 모른다.

어쨌든 무등경기장은 여느 공설운동장과는 다르다. 그래서 어쩌다 경기가 없는 날에도 무등경기장 근처를 지나다보면 귓가 가득 목이 터져라 외쳐대는 그 함성과 환호가 들리는 듯 하다.

무등경기장 자리는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촌이었다. 그전에는 일제때 광주천 직강화사업으로 인해 생긴 하천부지였다.

도시계획전문가 류영국 박사(공학, 전 광주시 도시계획상임기획단 수석연구원)는 피난민촌과 경기장의 관계를 공간에도 유전적 요소가 있다는 측면에서 해석하고 있어 흥미롭다.

류 박사에 의하면 "피난민촌에서 연상되는 삶을 위한 아우성이 내용은 좀 다르지만 운동경기를 보면서 관중들이 소리치는 함성과 어쩐지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피난민촌의 흔적은 지금도 무등경기장 야구장 인근에 남아있는데 일자형 평면을 가진 연변식 주택들이 그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주로 광주천변에 위치했던 피난민촌은 광주에 건설된 최초의 공영주택이라는 역사성도 갖고 있다. 시 자금과 일부 독지가의 기부 등에 의해 지어진 난민구호시설이었던 이 공영주택은 5∼6평 정도로 10호 정도가 연립해서 건축되었다고 한다.

무등경기장은 피난민촌의 일부를 밀고 들어선 것인데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65년 10월5일부터 10일까지 6일간 광주에서 개최된 제46회 전국체전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무등경기장 부지는 당초 하천부지로 1954년 당시 전남도지사가 시유지 일부와 전남방직 소유지 일부를 희사받아 토담으로 건립한 것이다. 마치 여느 학교에서나 볼 수 있는 정도의 '무등운동장'은 1965년에야 전국체전을 치르기 위해 관중석을 갖춘 경기장으로 탈바꿈했다.

이로서 무등경기장은 총부지면적 2만6천여평에 주경기장이 8천여평이고 야구장이 5천여평으로 주경기장은 3만여평을, 야구장은 1만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를 갖췄다.

무등경기장은 1965년 건립당시에는 광주공설운동장으로 명명되었으나 1977년 58회 전국체전을 광주에서 치르면서 오늘날같은 경기장 명칭으로 변경됐다. 또 58회 국체를 계기로 무등경기장의 규모는 지금과 같은 크기로 증축됐고 운동장에는 잔디도 심어졌다.

또 이때에 맞춰 무등경기장 서편에 부지를 마련 지금의 실내수영장을 국제경기도 가능한 규모로 개장,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주체육계의 원로인 안규승씨(광주시생활체육회 이사)는 "6.25때 전국체전을 광주에서 개최했는데 그때만 해도 서중학교 운동장에서 행사를 치렀다"며 "사실 65년에야 공설운동장이 건립된 것은 늦은 감이 있었는데 그후부터 무등경기장이 있었기에 각종 규모의 체육행사도 치를 수 있었고 광주 전남 체육발전도 이끌어 온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무등경기장은 결코 체육인들만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바로 그곳은 호남인들에게 스포츠를 넘는 애환이 서린 곳이기 때문이리라.

##이어진 기사


무등경기장 역사=전국체전 광주개최사?


무등경기장의 역사는 전국체전 광주개최사에 다름아니다. 무등경기장을 건립한 것 자체가 국체를 치르기 위한 것이었고 이후 증축과정도 그렇기 때문이다.

물론 광주에서 열린 최초의 체전당시에는 무등경기장이 없었다. 바로 한국전쟁중이던 1951년 가을 광주에서 개최된 32회 체전은 서중학교 운동장에서 주요행사가 치른 것. 그러나 이 대회에서 광주를 포함한 전남은 종합우승을 자치하는 영광을 맛봤다.

또 이 체전을 계기로 공설운동장 건립의 필요성이 대두, 전쟁이 끝난후 1954년 광주천 하천부지를 확보해 운동장을 마련했고 10년뒤인 1965년 제46회 대회를 치르기 위해 오늘날같은 규모의 경기장을 건립했다.

46회 대회에서 전남은 서울에 이어 2위를 차지했으나 32회 대회의 기록을 더듬으며 다시한번 우승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고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어 광주는 1977년 58회 전국체전을 유치했고 성적은 실업팀 부재 등으로 6위에 그쳐 도민들에게 실망감을 안긴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광주는 1986년 직할시로 승격한 이후 1987년 전남 7개 시군과 함께 68회 대회를 분산개최했다. 이 대회를 계기로 광주 전남은 따로 선수단을 구성, 참가함으로써 종합성적에서 하위권으로 처지기 시작했다. 광주는 1993년 74회 체전을 직할시 승격후 두 번째이고 통산 네 번째로 개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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