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전시서문' 쓸 수 없는가?
나는 왜 '전시서문' 쓸 수 없는가?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8.2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술 작가들이 전시회를 열면 대개 도록(pamphlet)을 발행하게 된다. 그 도록에는 전시회에 걸린 작품은 물론 작가의 이력도 소개되는데, 도록의 앞머리에 작가와 작품을 평하는 미술평론가(혹은 그에 준하는 문필가)의 글도 실리게 마련이다. 이러한 소개의 글을 이름하여 '서문'이라 칭하는데, 오늘은 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동안 나도 전시 서문을 적잖이 썼던 것 같다. 그림과 삶이 '일치'되는 작가 위주로 비평적 관점을 유지하는 등 나름대로 원칙을 두고자 했으나, 엉킨 전깃줄 같은 미술계 현실은 그 원칙을 지키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걸 절감한 순간 서문 쓰기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게 벌써 3-4년은 훨씬 더 지난 것 같다. 이제 누구도 전시 서문을 써 달라고 전화도 없으니 솔직히 시원섭섭하다.

전시 서문이 전시회를 여는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해의 통로라는 면에서 그것은 필요한 장치의 하나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게 의례적인 결혼식 주례사처럼 간주되면서 무용론이 제기되는 등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내 자신이 그에 어느 정도 일조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어느 순간 들었고, 그 때문에 서문 쓰는 비평 행위를 중단한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내가 작가로부터 글을 첫 '부탁' 받을 때 느끼던 감격과 두려움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언필칭 작가와 작품이 말하는 진실을 내 글이 전해야 한다니, 이 보다 숭고한 글쓰기가 어디 있을까 싶었다. 나는 많은 공력을 들여 글을 만들어 냈다. 물론 취재와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작가도 무슨 글이 나올까 적이 궁금해했겠지만, 사실 작가가 그 글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가 더 궁금했고 때로는 조바심마저 드는 거였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엔가 불편해지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작가의 반응에 신경을 쓰는 전시 서문에 점점 '맛'을 들이다 보니 내 글은 마치 중계방송하듯 밋밋한 인상비평으로 빠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작가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글을 의뢰한 작가에게 검열받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참으로 견딜 수 없었다. 그런 탓에 일종의 필화筆禍를 겪기도 했다. 결국 작가들로부터, 동업자(평론가)들로부터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하는 내 글(은 이미 반응을 얻을 필요조차 없는 종류의 글이었다)은 마치 원피스에 매단 브로우치처럼 도록의 그렇고 그런 장식품같이 여겨졌다. 급기야는 서문이라는 필요악의 장치를 통해 작가와 '합작'해 대중을 오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과도한 자학증세마저 들었다.

따지고 보면, 이런 이유는 순전히 핑계일지 모른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미술, 엄밀히는 서양(에서 건너온) 미술에 대한 지식의 결핍을 숨기고 있었다. 미술과 종횡으로 얽힌 과학적 철학적 배경의 일천함을 천박한 글쓰기로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예술'의 이름으로 뿜어져 나오는 감각의 도전, 그 도저한 힘을 얄팍한 이성의 도구만으로는 어쩌지 못해 낭패감에 쩔쩔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뿐인가. 작가들이 갖는 다분히 맬랑콜릭한, 보헤미안적인, 데카당스한 그 독특한 기질들에 멋지게 동화되지 못하고 열외에 서 있는 이교도적인 소외감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결국 나는 자질 부족 자격 미달을 솔직히 자인하고 손을 들고 만 셈이었다. 그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내 부끄러운 사적 고백에도 관계없이 미술계 현실은 이런저런 종류의 전시 서문 생산이 부단히 이루어지고 있다. 막힘 없는 수요가 있으니, 어디서건 그 공급은 충족되기 마련이다. 과거의 나처럼 1, 2년 속성 미술공부만으로 작가 혹은 작품을 비평할 수 있다고 나서는 용감무식한 이들이 아직도 있을 것이다. 사군자로부터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전천후 장르 불문의 글쓰기를 감행하는, 마땅히 '박사'라 칭해야 할 평론가도 보인다. 이 글이 저 글 같고, 저 글이 이 글 같은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풍의 안전한 글쓰기의 대가도 있다. 그런가 하면, 치사하게 고료 수입에 애면글면하는 교수 겸직 평론가도 있다고 어느 갤러리 주인이 귀띔해 주기도 한다.

지금도 절감하고 있는 내 박약한 시각적 미학적 경험 혹은 지적 토대는 사실 한 두 해 사이에 해소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내 삶의 견지해 나갈 방식, 더 나아가 세계에 대한 이해 방식의 문제에 직결해 있다. 다시 말해 외적 조건에 핑계와 이유를 달 일이 아니라, 순전히 내가 헤쳐나가 해결해야 할 숙제라는 점을 일러주는 것이다. 만시지탄이지만, 이 나라 미술계의 낡은 하비투스(습속)를 따라나서며 안일의 늪에 빠지면, 상하는 것은 내 자신이 아니라 내 글로 인한 작가와 작품, 대중이라는 각성을 염두에 두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는 결기에 우쭐대며 나댄 몇 년의 글쓰기가 결과한 소중한 교훈이었다.

결국 나는 도록에 매달린 전시 서문으로 격하된 비평행위를 더 이상 감내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힘이 닿는 한 미술과 관련된 내 행동주의는 미술문화 전반에 걸쳐 여러 방식으로 제시할 생각이다. 그렇다고 열정에 겨운 작가주의에 대한 도전의 은밀한 즐거움을 마냥 외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현재 나만의 눈으로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작가들이 없지 않은데, 그들과 나 사이엔 정말 '피 튀기는' 일전을 불사할 때가 올 것이다. 아직은 그들이 비장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준비과정 중에 있으므로 나 역시 칼을 갈며 이리저리 전황戰況을 살피고 있는 중이다. 나는 작가와 비평이 맞부딪치는 이런 멋진 전투야말로 미술계에 생산적인 가능성을 제시할 것으로 믿는다. 이와 같은 이성적인 미시행위들이 모이고 모여 고루한 미술의 낡은 제도들을 물리치고 현실에 붙박은 미술을 삶 속에 건강하게 이식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쉬운 것은 내가 손을 볼 작가들, 내 어줍잖은 비평을 무색하게 만들 '감각의 제국'을 관장하는 맑은 눈을 가진 작가들이 지금 당장 현실적으로 너무 가난한 나머지 변변한 전시회 한 번 열기 어렵다는데 있다. 서로 만나 자웅을 겨룰 전장戰場을 만들지 못하게 만드는 저 시퍼런 자본의 바다가 원망스러울 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