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광천공단-기름때 배인 생산도시화의 꿈
12. 광천공단-기름때 배인 생산도시화의 꿈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8.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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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프라스틱, 화천기공, KM사, 삼면스테인레스, 남선선반, 한국에르나, 아시아자동차, 세화공업사, 광동공업사…

광주시 최초의 계획적인 공업단지인 광천공단에 입주해있던 기업들이다. 지금은 이들 기업중 아시아자동차를 빼고는 대부분 하남공단과 소촌공단 등지로 이전해갔고 일부는 아예 부도로 없어졌다.

특히 아시아자동차가 IMF를 거치면서 기아차로 바뀌었고 옛 공단자리에는 백화점과 종합버스터미널, 예식장 등이 들어서 있어 사실상 광천공단의 흔적은 아예 없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광천공단은 광주를 생산도시로 만들기 위한 꿈이 서린 곳이며 70∼80년대 암울한 시대에 수많은 대학생들이 '노동자속으로' 투신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지역자본 언론 '호남차별 돌파' 합작품
지방재원으로 공장유치 69년 준공
들불야학 통해 저임금 충격적 노동조건 알려져
80년대 대학생 '노동투신' 현장으로


1966년 조성되기 시작한 광천공장은 1930년대 종연방직공장이 설립된 후 근대적 공장이 들어설 수 있는 대규모 공단으로 광주산업화의 한 장을 연 곳으로 기록될 만하다. 이는 또 근대화=공업화=공장유치라는 패러다임 하에 진행된 광주 생산도시화 계획의 출발이기도 하다.

전남대 정근식 교수(사회학과)는 광주 생산도시화론은 박정희 정권의 지역차별에 대한 지역자본가와 이를 대변한 언론이 만들어낸 합작품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박정희정권이 국부를 투자하는 기본축을 경부고속도로를 중심으로 한 영남지역으로 잡으면서 호남이 소외되기 시작하자 기득권세력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며 이에대한 반발로 생산도시화론을 제창하게 됐다는 것이다.

자역자본가와 지역언론을 중심으로 66년 5월 광주에서 결성된 '공장유치추진위원회'를 시작으로 그해 9월 '푸대접시정위원회', 68년 '호남권익투쟁위원회'의 조직이 그것이다. 광천공단은 이 과정에서 지방공단(도지사 관할하에 지방재원으로 육성)으로 조성되기 시작해 69년 1월 총 부지 72만평 규모로 준공된 것이다.

광천공단은 19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활동하며 '광주의 아들'로 기억되고 있는 박관현열사가 처음으로 사회문제에 눈을 뜨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바로 1978년 겨울 박관현 등 전남대 학생들과 들불야학팀이 노동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내기 위해 발로 뛰며 만들어낸 '광주공단실태조사보고서'가 그것.

이 보고서에는 당시 광천공단의 규모와 함께 노동자들의 실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1979년 봄에는 학보인 전대신문에 게재되고 일간신문에도 보도되면서 지역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던져주었다.

이에따르면 1978년 12월31일 현재 입주업체는 총 63개에 불과했고 종업원 100인 이상의 사업체는 불과 세 개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나마 가동중인 사업체는 51개로 나타났다.

보고서 내용중 충격을 던져준 것은 노동자들의 참혹한 노동조건이었다. 월평균임금이 3만5천원이하가 24.4%로 가장 많은 반면 10만원이상은 불과 7.7%에 지나지 않은 것. 이는 노총이 78년 6월 조사한 산하 조합원의 월 기본급 평균이 7만4천121원과 비교해보면 광천공단의 경우 그 절반도 안되며 더구나 노총이 79년 제시한 5인 가족 최저 생계비 19만 687원과 비교하면 18.4%에 불과하다.

이같은 내용을 중심으로 한 조사보고서는 결론에서 저임금과 임금격차의 해소, 작업환경과 복지시설의 개선, 인간다운 삶의 보장과 비인간적인 대우 개선, 노조 결성의 자유와 자유로운 활동의 보장, 패배적이고 소극적인 의식구조의 청산 등을 개선해야 할 점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보고서가 계기가 돼 조사팀은 전남대내에서 사회조사연구회라는 서클을 만들어 장차 학생운동의 지도부를 형성하게 되고 광천공단내에서 활동하던 들불야학팀도 전보다 더 왕성하게 활동하다 광주항쟁을 맞게 된다.

광천공단은 80년대에도 대학생들의 '투신'현장이 된다. 이 시기 적어도 100여명이상의 학생운동 출신자들이 광천공단의 노동자로 변신한 것이다.

전남대 영문과 출신으로 80년대 중반 광천공단에서 노동운동을 했던 김영집씨(참여자치연구소 소장)는 "당시 대부분의 공장들이 그리 크지 않은데다 영세한 탓인지 노동자들은 저임금으로 착취를 당했고 오늘날같이 노동자다운 대접도 받지 못해 사회문제를 고민하는 대학생들이 외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학생운동을 마친 이들이 집단적으로 학습하며 조직적으로 공장에 취업하면서 부분적으로 현장운동이 활성화되었고 87년 6월항쟁이후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노동운동과 결합했다"며 "그런 역량이 지금 민주노총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그러나 "당시를 되돌아보면 칙칙했다"고 회고했다. 기름때 때문일까. 물론 그 칙칙함에는 기업가의 생산도시화의 꿈과 함께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 그리고 분노까지도 함께 베어 있으리라.


이어진 기사- 광주 생산도시만들기 전개과정

생산도시 실패가 정권교체 원동력?



광주는 자타가 공인하는 '소비도시'다. 결국 60년대부터 광천공단으로 시작된 생산도시화 프로젝트가 현실화되지 않은 셈이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정권을 거치며 지역차별이니 지역불균등발전이니 하는 조어들이 생산된 것도 그 반증이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광주는 생산도시화가 최대화두중의 하나다. 광천공단이 들어선 이후 본촌·송암공단이 1978년 6월 착공해 1983년 12월 준공했고 80년대에 하남공단이나 평동공단이 개발됐지만 아직도 생산도시화는 과제로 남아있기 때문.

노태우정권이후 생산도시화는 내용을 달리하게 된다. 바로 첨단산업이 그것인데 국민의 정부들어서는 '광산업'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하지만 광산업도 아직은 연구단계에 머무르고 있어 광주에 뿌리를 내릴지는 아직 미지수다.

생산도시화와 관련, 정근식 교수의 다음과 같은 진단은 흥미롭다. 첫째 생산도시화는 지역 기득권세력의 지배이데올로기다. 그동안 지역 기득권세력이 중심이 돼 추진된 생산도시화운동은 사실 공장유치=일자리창출=지역발전이란 패러다임을 통해 지역사회를 지배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꼭 지역사회의 활로가 굴뚝산업에만 있었는지, 아니면 생태적 문화적 가치를 극대화하는 방법은 없었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사실 첨단산업으로의 방향전환도 전통적인 굴뚝산업에 대한 회의가 아닌가.

두 번째 정권교체의 원동력은 생산도시화의 실패다. 바로 호남인들이 87년부터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맹목적일 정도로 지지를 보낸 것은 역대정권의 생산도시화 실패의 결과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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