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 조선인들의 지옥섬, 군함도를 다녀오다
강제징용 조선인들의 지옥섬, 군함도를 다녀오다
  • 홍인화 전 시의원/국제학박사
  • 승인 2017.12.06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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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어머니집 역사탐방 동행기
▲ 군함도 모습

오월어머니집 회원들과 함께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조선인들의 한이 서린 지옥섬, 군함도를 다녀왔다.

일본 후쿠오카와 키타큐슈 지역을 둘러보는 이번 탐방은 오월어머니집에서 진행한 올해 마지막 역사문화탐방이었다. 지난 11월 14일부터 17일까지 3박4일 일정으로 추진된 이번 탐방에는 오월어머니집 회원들 62명이 참여했다. 해외탐방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면서 노구를 이끌고 참석한 어머니들도 많았다. 역시 오월어머니다웠다.

필자는 어머니들께 빼빼로를 선물하고자 뻬빼로 가방을 메고 갔다. 간식은 각자가 챙겨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14일 오월어머니집 앞에서 우리 일행들은 대형버스 두 대에 몸을 싣고 김해공항으로 간 뒤, 이곳에서 비행기로 키타큐슈공항에 도착했다.

도착 첫날에는 태재부 천만궁을 돌아보았다, 일본의 ‘학문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스가와라 미치자네를 제사지내는 곳이라고 한다. 수능시험을 며칠 앞두고 간지라 더욱더 유심히 살펴보게 됐다.

둘째 날에는 이번 탐방의 주요 목적지인 ‘군함도’를 갔다. 군함도는 일본말로 하시마(端島)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의 한이 서린 섬이다. 멀리서 보면 군함 같다고 해서 군함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알려졌다.

멀리서 보면 군함 같다고 해서 군함도

군함도는 일본 나가사키(長崎)현에 속하고, 나가사키(長崎)에서 약 18㎞ 떨어져 있다. 야구장 2개 크기로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는 섬이지만 5,000명 이상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고, 전성기에는 헥타르당 무려 835명이라는 세계 최대의 인구밀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많은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되어 이 섬에서 석탄을 캐기도 했다. 그러나 석유 때문에 석탄이 도태되면서 1970년대 이후 에너지 정책의 영향을 받아 1974년 1월 15일에 폐광되었다. 폐광 당시 2,000명으로 줄었던 주민은 3개월 뒤인 4월 20일 모두 섬을 떠났다. 하지만 당시의 자취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수많은 건물들은 사람이 다 빠져나가 폐허가 되어 마치 폐건물처럼 변해있었다.

▲ 조선인 강제 징용지

이 조그마한 섬 위에 고층건물, 그것도 폐허가 된 고층건물은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곳들 중 하나이다. 바로 조선인 강제 징용지다. 이 섬에서 죽은 사람들이 많지만, 그다지 알려지지 않아 모르는 이들이 보기에는 신기한 곳일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인, 중국인, 동남아시아 사람들로서는 신기하게만 여길 수는 없는 곳임에 틀림없다.

오월어머니집 회원들은 군함도에 도착해서 “그들의 울부짖음이 들리지 않느냐?”면서 천천히 돌아보았다.

군함도는 살아서 나올 수 없었던 지옥섬

섬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당시 조선인들은 '들어가면 살아서 나올 수 없는 지옥문'이라고 불렀다. 섬 자체도 지옥섬, 또는 감옥섬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게다가 이들이 받은 대우는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다고 할 정도였다. 파도가 들이치는 바닷가 집에 강제로 살게 했는가 하면 햇빛도 안 들어오는 아파트 지하층에서 살게 한 경우도 허다했다고 전해진다. 군함도를 탈출하려고 시도한 조선인들도 여럿 있었으나, 험한 파도에 휩쓸리거나 발각되어 총살당하는 경우가 거의 대다수였다고 한다.

또 이 섬에는 한글로 된 낙서가 곳곳에 남아있다고 한다. 징용이 본격화된 그 시기에는 한글과 한국어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엄청난 처벌과 학대를 받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글로 남기지도 못할 학대의 상흔을 낙서로나마 위안 받고 싶었음에 틀림없다.

이곳엔 또한 1916년 미쓰비시가 세운 일본 최초의 철근콘크리트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폐광되고 난 뒤에도 섬의 소유권은 미쓰비시 마테리얼이 소유하고 있었으나 2001년에 지자체인 다카시마정에 무상 양도되었으며, 지금은 나가사키현으로 편입되어 나가사키시의 시유지가 되었다.

미쓰비시는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 사람들을 강제 노역시킨 전범기업이다. 광주에서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미쓰비시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광주지법이 14년 만에 승소 판결을 내렸다. 미쓰비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명한 제로 전투기를 정부에 납품하는 등 일본 제국주의와 함께 성장한 대표적인 기업이다.

미쓰비시는 지난해 강제노역한 중국인 노동자에게 보상금을 제공했고 미국, 영국 등을 방문해 강제노역에 동원된 전쟁포로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한국인 피해자는 보상이나 사과 대상에서 제외했다. 천인공노할 일이다.

군함도는 2009년 4월 22일부터 관광객의 상륙과 견학이 가능해진 섬이다. 하지만 견학시설 이외의 섬 전체는 아직까지도 출입금지구역이다. 출금 해제 한 달 만에 4500명이 넘는 인원이 섬을 방문했으며, 1년 만에 약 59,000명이 섬을 방문했다. 하지만 일본 측은 관광객들에게 이 같은 아픈 역사를 설명하지 않는다. 안내센터를 도쿄에 설치하겠다고 한다. ‘군함도를 우린 어떻게 바라 봐야 할까’란 의구심이 강하게 드는 대목이다.

군함도 내의 메이지 시대 건축물은 다 무너져가는 3m 남짓의 제방 하나 뿐

참고로 이 섬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2015년 7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었다. 메이지 유신 시대의 근대화의 산물로서 유네스코에 등록되었지만, 정작 현재 군함도 내의 메이지 시대 건축물은 다 무너져가는 3m 남짓의 제방 하나 뿐이다. 나머지는 전부 메이지 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현재 기준으로 60년 정도 된 건물뿐인 것이다. 100년 전에 만들어진 집을 리모델링 해두고 근대문화유산이라고 주장한 것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 이 사각벽돌이 근대문화유산이라고 한다.

조선인들이 강제징용되어 잔혹하게 죽은 아픈 역사의 장보다는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의 놀라운 결과물이라는 좋은 이미지로 탈바꿈시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사실은 그래서 한국인들에게는 더욱 씁쓸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문화유산 관리 권한을 가지고 있는 일본 당국이 조선인 강제징용 사실을 얼마나 잘 알릴지도 여전히 의문이다. 1986년 일본의 시민단체인 '재일 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에서 사료로서 제시한 화장매장 인허증에 따르면, 1925년~1945년 사이 군함도 탄광에서 총 1,295명이 숨졌으며, 이중 조선인은 122명이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다음으로 우리 일행은 군함도를 비롯해 일본군 위안부 전쟁 후 배상부터 강제노동, 한국과 중국에서의 침략 등을 전시하고 있는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에 들렀다.

‘평화자료관’은 일본의 무책임한 태도를 고발하는 것에 생애를 바친 고 오카마사하루(岡正治)목사의 유지를 받들어 사실에 기인한 일본의 가해책임을 호소하기 위해 시민의 힘으로 설립되었다.

사과도 보상도 하지 않는 무책임한 태도는 국제적인 신뢰 잃게 하는 것

‘평화자료관’의 설립 취지에는 “정치, 사회, 문화를 담당하는 사람들의 역할은 비록 작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시민이다. 일본의 침략과 전쟁으로 희생된 외국인들은 전후 50년이 흘러도 어떤 보상도 없이 버려졌다. 가해의 역사가 숨겨져 왔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과도 보상도 하지 않는 무책임한 태도만큼 국제적인 신뢰를 잃게 하는 것은 없다. 하루라도 빨리 전후보상의 실현과 두 번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맹세를 위해 헌신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밝히고 있다.

▲ 평화기념관에서 노영숙 오월어머니집 관장과 나가사키 원폭피해자 회장이 환담하고 있다.

시민의 힘이 위대하다는 걸 알게 하는 대목이다. 오월어머니집의 회원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십시일반 모금을 해서 좋은 일에 쓰라고 후원을 했다. 이에 나가사키 원폭피해자 회장은 내년에 ‘오월어머니집’을 방문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우리 일행은 나가사키 평화공원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7만 명이 사망한 원폭중심지에 나가사키 평화기념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 기념상은 남자 청동상으로 하늘로 향한 오른손은 전쟁의 위협을, 수평으로 뻗은 왼손은 평화를 표시하고, 가볍게 감긴 눈은 원폭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 나가사키 평화기념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피해자인 양 코스프레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

하지만 일본은 원폭으로 인한 희생만을 강조하며 피해자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다고 한다. 전쟁은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커다란 아픔이다. 그런다고 해서 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일본이 피해자인 양 코스프레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과와 오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

마지막 날에는 지옥 고문을 당하고 끓는 유황물 속에서 죽었다는 기독교순교지 ‘운젠지옥’과 1991년 화산폭발로 부서지고 땅에 묻힌 가옥 여러 채를 그대로 보존해 관광특구로 지정한 ‘미즈나 혼진’을 둘러봤다.

하루만에 43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사로 화산 분출로 인한 재해는 5년간 계속 되었고, 그 동안 꾸준한 국민운동으로 마을은 복구되었다고 한다. 일부는 그대로 보존하여 화산의 피해를 직접 볼 수 있게 하면서 경각심을 심어주고 있다. ‘일본답다’는 게 이런 거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또 이날 사마바라 무사마을도 들렸다. 이 도시를 지킨 무사들이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나름대로 멋을 부린 깨끗한 마을이었다. 독특한 것은 길 한가운데 작은 도랑이 있었는데, 무사들이 살던 시대에 식수로 쓰이던 물길이라고 전한다. 아주 작은 것도 관광 상품화 해내는 일본의 모습이 한편 놀랍다.

이처럼 강행군을 한 뒤 저녁에 온천을 하고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어떻게 오월어머니집 회원이 되었나”하는 사연들이 오갔고, 이를 통해 37년 전 오월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에 서로 공감하며 웃기도 했고, 서로의 동변상련이 저절로 역지사지가 돼 함께 울기도 했다. “상무관에서 덤프트럭이 시신을 싣고 간 걸 봤어”하는 이야기 등에서부터 5.18이후 지속적인 운동으로 이끌어간 광주공동체이야기 등, 모두가 바로 우리 광주의 이야기였다.

‘오월어머니들은 참으로 위대했구나’라는 생각을 고이 간직하며 여정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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