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현 열사는 군부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
박관현 열사는 군부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
  • 정선아 기자
  • 승인 2017.11.29 23: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80년 전남대 총학생회와 박관현' 주제 광주정신 시민집담회 열려
"옛 전남도청에 울린 박관현 열사의 사자후 잊지 못할 것"
"박관현 열사는 광주항쟁 중 죽은거나 마찬가지"

1980년 전남대 총학생회와 새벽기관차 박관현 열사의 활동과 광주항쟁에 준 영향력, 그리고 항쟁 당시 총학생회의 10일간 부재에 대해 설명하는 광주정신 시민집담회가 29일 오후 5.18민주화운동 기록관 7층 세미나실에서 열렸다.

80년 5월 당시 운동가들과 시민들이 대거 참석한 이번 잡담회는 전남대학교 5.18연구소와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 주관하고 5.18기념재단, 관현장학재단이 주최했다.

먼저 발제자로 나선 최용주 5.18기념재단 비상임연구원은 전남대 총학생회가 반독재에 맞서 일구어 냈던 조직적 항쟁의 역사에 대해 설명했다.

최 연구원은 “1980년 4월 10일부터 5월 초순까지 회장 박관현과 전남대 총학생회는 대표적인 학내민주화 운동인 어용교수 퇴진운동과 병영집체훈련 거부투쟁으로 공개조직을 통한 정치투쟁의 대중성을 확보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하며 정권의 실세로 부상되는 것을 보고 5월 8일부터 총학생회는 ‘민족민주화성회’를 교내에서 개최하고, 14일까지 계엄령을 해제하고 정치일정을 밝힐 것을 최규하 정부에게 공식적으로 요구했다”고 설명했다.

‘민족민주화성회’로 학생들과 시민들의 ‘조우’와 ‘연대’ 시작

최 연구원은 “5월 8일 이후 계속해서 열린 교내 ‘민족민주화성회’는 연대의식과 단체행동의 동력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던 감동스러운 순간의 연속이었다”며 “여기에 박관현의 탁월한 연설능력이 더해져 학내 분위기는 더 이상 팽창할 수 없는 풍선과 같았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5월 14일 교내에서 열리던 집회 중 학생들이 정문을 돌파하고 교문 밖으로 진출했다. 교외집회는 15일부터였는데 열기를 억누르지 못한 것이었다”면서 “수많은 학생들이 도청 앞 분수대로 집결하자 근처의 시민, 조선대, 광주교대 학생들도 합세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또 그는 “분수대 광장에 올라간 박관현은 ‘제가 전대학생회장 박관현이올시다’로 사자후를 시작하며 청중들을 압도했다”면서 “학생들과 시민들이 도청 앞 분수대라는 공간에서 처음 조우하고 연대하여 일순간 해방의 열기가 가득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그는 “16일 대한민국의 모든 지역이 숨죽이고 있을 때 유일하게 광주에서만 집회가 열렸고, 당시로서 상상하기 힘든 야간 횃불집회로 이어졌다”면서 “이날 박관현은 ‘휴교령이 내리면 즉각 교문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단상을 내려왔지만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박관현 열사는 도망치지 않았고, 광주항쟁 중 죽었다

최 연구원은 “계엄군이 광주시민을 살육하고 있을 때 광주시민들과 동지들은 도청 앞 분수대에서 애타게 박관현을 찾으며 교문 앞에서, 도청에서, 금남로에서 죽고 다칠 때 검거 된 박관현은 옥중에서 단식하다가 죽었다”며 “박관현은 사실 광주항쟁 중에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고 주장했다.

이어 “살아남은 운동가들을 옥죄는 회한과 자책은 오래갔다. 하지만 자책과 회한으로 낭비하기에는 과제가 너무 많았다”면서 “그들은 죽은 자들에게 진 빚을 이런 식으로 갚아지는 것도 아님을 깨달고 곧 제자리로 돌아와서 서로의 눈을 쳐다봤고 서로를 격려했으며 앞서 간 동지들의 얼굴을 떠올렸다”고 덧붙였다.

한편, 박관현 열사가 죽고 난 며칠 후 미국 CIA 한국지부는 박관현의 죽음이 가져 올 한국 학생운동의 변화를 분석한 기밀문서를 작성해서 본국으로 보냈다.

이들은 이 보고서에서 앞으로 한국의 학생운동은 박관현 이후로 상징되는 이른바 ‘광주세대’가 주도할 것이며 한국의 정치발전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최 연구원은 “이 광주세대가 바로 87년 6월 항쟁 세대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며 “비록 회한이 많은 세대이지만,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이끈 광주세대가 자랄 수 있는 토양을 일구는데 일조했다는 자부심은 지키고 싶다”고 피력했다.

당시 박관현 열사와 같이 들불야학 학생이었던 나명관 씨는 “술자리가 깔끔하게 끝나는 날은 무조건 박관현 그가 있었다. 지긋이 웃으며 이야기를 들어주는 그가 있었던 날 분위기는 항상 유했다. 과묵하고 말없었던 박관현 총학생회장의 도청 앞 사자후가 아직도 생생하다”고 회고했다.

이어 그는 “내년이면 40주년 기념행사로 들불기념사업회에서 박관현 열사를 비롯하여 들불열사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활동했는지 체계적으로 자료를 정리할 것이다”고 밝혔다.

80년 당시 전남대자연대학생회장이었던 윤목현 동강대학교평생교육원장은 “오랫동안 억눌렸던 조국의 민주화가 모든 학생들의 염원으로 불타오르던 시절. 순수한 학생자치회비는 내란자금으로,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는 내란 사전 모의로, 광주시민들의 요구 역시 폭도들의 난동으로 몰았다”고 회고했다.

이어 윤 원장은 “그 후 우리 동지들은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으로, 자책과 회한으로 30여년을 넘게 그렇게 보냈다. 이제 살만큼 살았고 마실만큼 마셨다. 세월의 무게에 몸은 무뎌져 가지만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유신과 군사독재 청산을 위해서 다시 신발 끈을 당겨 매본다”고 각오를 밝혔다.

박관현 열사와 절친한 동료였던 정용화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이미 1978년 3월부터 박관현과 나, 그리고 양강섭 등은 운동권 학습 중이었다. 78년 6월 29일 전남대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에 이어 조선대 선언문 사건이 터지며 나는 주동자로 구속 수감되고, 함께 했던 양강섭 친구도 무기정학에 처해져 집으로 쫓겨 갔다”고 밝혔다.

이어 정 이사장은 “나는 관현이가 78년 늦여름과 가을 그리고 겨울에 무언가 결단 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필경 친구를 감옥으로, 그리고 집으로 떠나보낸 외로움과 부채의식에 시달렸을 박관현은 ‘내가 고시만을 위해 대학을 다닐 수는 없지.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돼!’라고 나는 결단 했을 거라 생각한다. 관현이는 언제나 나의 가슴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