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더 덥게 하는 것들
나를 더 덥게 하는 것들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8.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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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나기가 갈수록 힘들어지는 것 같다. 더위에 대한 저항력이 점차 떨어져 가는 탓도 있겠지만 기상변화가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유가 그것뿐이라면 한약방에서 보약이라도 한 재 지어먹고 기상청예보에 시청각을 곤두세우면 그다지 힘든 여름나기도 아닐 것이다.

유독 긴 올 장마 때문에 노심초사하고 있는 서울 근방 사람들에게는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십여 일 가까이 34도를 웃도는 기온이 계속되다보니 도대체가 의욕이 생기질 않는다. 주택에서 살고 있는 분들에게는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그나마 아파트의 위층에 사는 덕분에 선풍기에 의지해서 더위를 물리칠 수 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하지만 그것도 안심할 수 없는 게 올 해에는 아파트 쓰레기장에 에어컨 박스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이집저집 에어컨 필터 열기
"당신도 하나 사" 권하고


주변에서 에어컨을 사용하게 되면 창문이라는 창문은 있는 대로 열어놓은 우리집으로 필터의 열기가 몽땅 몰려들어올 것이고 결국 어쩔 수 없이 쓰레기장에 에어컨 박스가 하나 더 늘어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 난 분명히 '어쩔 수 없이' 라고 했다. 내 의사에 따른 결정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위가 내 의사를 강요함으로써 일어난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다른 사람들도 에어컨의 구매가 자신들의 의지에 따른 행동이 아니라 계급적 상승효과라는 허위의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라거나 아니면 거꾸로 에어컨하나 마련 못하는 무능한 가장을 둔 집(정확한 용어는 잘 모르겠지만 에어컨의 외부 필터라 해 두자. 그 외부필터는 가전 제품의 신제품 출시 사이클이 갈수록 짧아지고 경박단소해지는 경향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 외부필터에 대해서 전시효과라는 혐의를 지울 수가 없다)으로 낙인찍힐까 두려워 무리를 해서라도 설치를 했을 수도 있다.

유달리 여름을 타는 나의 경우도 이 정도의 더위라면 선풍기로 충분히 견뎌낼 수 있는데 문제는 더위 외적인 요인(?)이 선풍기를 밀어내고 에어컨에게 자리를 내주게 한다. 그런 부질없는 생각들이 체감온도를 더욱 높인다.

시공 넘나드는 독사계획했더니
여기저기 "바다·계곡 안 가세요?"
체감 온도는 더 높아만 간다.


여름나기가 힘들게 하는 것은 또 있다. 언제부터였을까, 여름이 되면 "피서 안 가십니까?"하고 말을 건네는 게 인사처럼 되어버린 것이. 휴가철 피서지 풍경을 비춰주는 뉴스를 보면 바다건 계곡이건 그것은 피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영서(迎暑)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차장같은 고속도로를 타고 산으로 바다로 몰려가는 피서객들을 보면 죽음을 불사하고 비행기 엔진을 향해 돌진하는 매미들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어디 피서가 바다와 계곡뿐이겠는가. 올 여름에는 '오지마을을 찾아' '고개를 찾아' 가거나 '화인'들의 '화첩기행'을 다녀 올 계획을 세웠고 장마가 끝나자마자 괴테를 따라 이탈리아를 둘러보고 시몬느 보브와르와 함깨 2차세계대전 직후의 미국을 다녀온 뒤 전에 세워둔 계획대로 시공을 넘나들며 국내여행을 시도하려했지만 아이들과 주변의 등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 또한 매미가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영서(迎暑)를 다녀와서 다시 여행길에 오르겠지만 마음이 영 개운치가 않다. 이 또한 내 의사와는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피서 = 바다 혹은 계곡(그것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한 곳) 이라는 등식이 한국사회의 휴가 문화아닌가. 여기서 다시 나는 에어컨이 지니는 한국사회의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의 속성을 전혀 무리없이 끌어온다. 에어컨 자리에 '피서법'를 갖다놓으면 별로 머리를 쓰지 않고서도 훌륭한 작문이 된다. 적어도 한국사회에서 "피서 안 가십니까?"라는 말은 인사가 아니라 폭력이다. 그 말에는 인사를 받는 이의 의사를 강요하는 한국사회의 집단무의식이 암암리에 스며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자신만의 피서법은 이미 그런 피서문화에 길들여진 주변과 아이들을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체감온도는 다시 상승곡선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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