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기행(4) 다산(茶山)과 고산(孤山)을 만나다
실학기행(4) 다산(茶山)과 고산(孤山)을 만나다
  • 정규철 인문학연구소 학여울 대표
  • 승인 2017.11.15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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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다. 가을빛이 뜰 안에 가득하면 괜히 가슴이 설레고 아득히 먼 추억 속의 풍경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럴 때면 아무도 모르게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인다. 마음에 둔 친구와 동행하여 문학이나 역사기행에 참여해도 좋겠고, 아니면 푸른 물결 넘실대는 바닷가나 깊은 산 오솔길을 발이 닳도록 걸으면서 생활에 찌든 머릿속 잡념들을 시원스럽게 날려버리면 어떨까. 독자들의 가을 여행에 좋은 길잡이가 될 것 같아 정규철 인문학연구소 학여울 대표의 저서 「역사 앞에서」에 실린 ‘실학기행’을 싣는다. 문화와 역사의 향기가 폐부를 찌를 것이다. 다산, 성호, 반계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민족 역사의 일대 전환을 모색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편집자 주>

이튿날 9시 배로 목포항을 거쳐 강진 다산초당으로 향했다. 선생이 외롭게 홀로 계시면서 실학을 집대성한 곳이다.

   
▲ 다산초당(茶山草堂)

다산초당(茶山草堂)은 강진군 도암면 만덕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강진에서 18년간의 유배생활을 했는데, 그 중 1808년부터 1818년까지 약 10년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귤동마을의 다산초당은 본래 윤단이 사용하던 정자인데, 다산이 여기서 거처하면서 후학을 가르치고 500여 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초당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동암(東庵)과 서암(西庵)을 짓고 학동들은 서암에, 다산은 동암에 거처했다.

다산초당은 본래 초가였다. 1936년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57년 현재의 기와집으로 복원한 것이다. 초당에서 동쪽으로 연못을 지나면 동암이 있다. 동, 서암 모두 1970년대에 강진군에서 복원해 놓은 건물이다. 다산(茶山) 4경이라 불리는 정석(丁石)바위, 약천(藥泉), 다조,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은 모두 다산의 유배생활과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 다산이 손수 불을 지펴 차를 끓여 마셨다는 다조

특히 다조는 초당마당에 있는 널찍한 반석으로 이곳에서 손수 불을 지펴 차를 끓여 마셨다. 연지석가산은 네모난 연못 가운데에 작고 둥근 섬이 있는데 다산이 탐진강 가에서 직접 돌을 주워다가 만든 것이라고 한다. 선생의 정신적 여유가 엿보인다.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 모양이라는 것이 당시의 동양사상이다. 그래서 땅에 연못을 팔 때 네모로 파고 그 안에 둥근 섬을 만드는 방지원도(方池圓島)양식이 우리나라 연못의 정형이다. 이는 󰡐하늘 기운을 땅 그릇에 담는다󰡑는 맥락이기도 하다.

▲ 연지석가산은 네모난 연못 가운데에 작고 둥근 섬이 있는데 다산이 탐진강 가에서 직접 돌을 주워다가 만든 것이라고 한다.

초당에서 오솔길 따라 20분 정도 걸으면 백련사에 이른다. 839년(신라 부성왕 1) 무염선사가 창건한 절인데 당시는 '만덕사'라 했다고 한다. 고려 후기인 1211년(희종 7) 원효국사 요새가 백련결사의 터전으로 중창하면서 그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당시 귀족불교에 대한 서민불교운동이 한창이던 1236년 요새가 '백련결사(白蓮結社)'를 일으켰는데, 1천여 명의 주민과 도반 300여 명이 참여하였다고 한다.

다산은 백련사 말고도 해남 대둔사 승려들과도 교류가 활발했던 것 같다. 최근 발견된 다산친필 서간첩 『매옥서궤(梅屋書匭)』는 대둔사 중 호의(縞衣) 대사(1778~1868)와 완호(玩虎)에게 보낸 편지를 합첩하여 책으로 만든 것이다.

호의는 화순적벽 망미정 주인 적송 정지준의 후손이다. 속명은 정계방(丁桂芳)이고 다산선생이 호의의 법호에 게송을 붙였으며 해거(海居) 홍현주(洪顯周)가 스님의 모습을 찬미하는 글을 지었다. 백파(白坡) 신헌영(申獻永)이 영정을 찬미하는 글을 짓고 탑명을 썼다. 저술로 행장 1권 견문록 1권이 있다.

다산의 편지가 열세 통, 맏아들 학연의 편지가 두 통, 모두 열다섯 통인데 수신자는 완호 스님에게 보낸 한 통을 제외하고는 모두 호의 스님이다. 세속의 성씨가 다산과 같은 정씨(丁氏)여서 다산은 그를 유난히 아꼈다. 호의는 다산보다 17세 아래이며 다산은 그를 제자로 여겨 군(君)으로 불렀다. 초의(草衣)와 하의(荷衣)와 함께 완호의 법맥을 이은 삼의(三衣)의 한 사람이다. 다산은 이들과 교류하면서 『대둔사지』 발간을 지도, 완성하였다.

백련사 주차장에서 30여 분이면 해남 윤선도 고택 녹우당에 도착한다. 녹우당(綠雨堂)은 고산 윤선도 선생이 살았던 집으로 선생의 4대 조부인 어초은(魚樵隱) 윤효정(尹孝貞, 1476~1543)이 해남 연동(蓮洞)에 터를 정하면서 지은 15세기 중엽의 고택이다.

▲ 녹우당(綠雨堂), (사진출처=해남군)

녹우당은 효종이 옛날의 사부였던 고산을 위해 수원에 지어주었던 집인데 훗날 해남으로 귀향하면서 길이 간직하기 위하여 수원집의 일부를 뜯어 옮겨왔다. 이것이 현 고택의 사랑채로 원래 이 사랑채의 이름은 녹우당이었다.

사랑채 현판에 걸려 있는 녹우당이라는 당호는 공재 윤두서와 절친했던 옥동(玉洞) 이서가 쓴 것이다. 이서는 성호 이익의 이복형이며 동국진체 글씨의 원조이다.

녹우당 뒷산에는 비자나무 숲이 있는데,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흔들리며 마치 비가 내리는 듯한 소리를 낸다고 해서 녹우당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집터 뒤로는 덕음산이 있고 앞에는 벼루봉과 그 오른쪽에 필봉이 자리 잡고 있으며 어초은사당, 고산사당, 추원당 등이 속해있다.

집 앞 터에 고산유물관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근래에 군비 20억, 도비 30억, 국비 50억을 들여 지은 현대식 건물이 위용을 뽐내고 있다. 다산이 유배지에서 위대한 학문적 성과를 이룰 수 있었던 데는 외가인 해남윤씨 집안에 전해오는 서책을 손쉽게 열람하고 경제적 지원도 받을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녹우당 앞 은행나무 그늘에 앉아서 2박 3일 동안에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았다.

옛말로 한양 천 리 길인데 반도 끝에 있는 흑산도를 거쳐 이곳 해남까지 왔다고 생각하니 교통의 편리함을 새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마간산 격으로 살펴보았지만 시대고를 앓으면서도 꿋꿋하게 살다간 선인들의 모습이 뿌듯한 감동으로 남는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고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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