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기행(3) 흑산도에서 정약전과 최익현을 만나다
실학기행(3) 흑산도에서 정약전과 최익현을 만나다
  • 정규철 인문학연구소 학여울 대표
  • 승인 2017.11.0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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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다. 가을빛이 뜰 안에 가득하면 괜히 가슴이 설레고 아득히 먼 추억 속의 풍경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럴 때면 아무도 모르게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인다. 마음에 둔 친구와 동행하여 문학이나 역사기행에 참여해도 좋겠고, 아니면 푸른 물결 넘실대는 바닷가나 깊은 산 오솔길을 발이 닳도록 걸으면서 생활에 찌든 머릿속 잡념들을 시원스럽게 날려버리면 어떨까. 독자들의 가을 여행에 좋은 길잡이가 될 것 같아 정규철 인문학연구소 학여울 대표의 저서 「역사 앞에서」에 실린 ‘실학기행’을 싣는다. 문화와 역사의 향기가 폐부를 찌를 것이다. 다산, 성호, 반계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민족 역사의 일대 전환을 모색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편집자 주>

   
 

우리 일행은 곰소 쉼터에서 '젓갈정식'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목포 신안비치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가 불빛에 반짝거렸다. 항구 도시 목포의 밤은 아름다웠다. 전 신동아건설 신광웅 사장의 안내로 밴댕이 횟집에 들렀다. 밴댕이 젓갈은 먹어 보았지만 회로는 처음 맛보았는데 과연 미식가들의 식도락이 될 만하였다. 무더운 날씨에 강행군을 한 탓인지 꿀맛 같은 잠에 빠져 눈을 떠보니 아침이다.

쾌속정은 7시 50분 여객선터미널을 미끄러지듯 빠져나가 도초, 비금을 지나 흑산도에 닿았다. 숲이 검도록 푸르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더니 첫인상이 과연 그러하다. 10시부터 버스로 섬을 한 바퀴 돌았다. 길은 해안 절벽을 지나고 꼬불꼬불한 산 고개를 넘어가는데 홍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와 있고 푸른 바다 위에는 수없이 많은 섬들이 떠서 흘렀다.

   
   
 

손암 정약전 선생의 배소(配所)는 흑산도에서도 가장 외딴 곳인 사리(沙里)에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궁벽한 오지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이곳에서 일명 사촌서당(沙村書堂)이라 불리는 복성재(復性齋)를 세워 후학들을 양성하고 저술도 하였다. 걸어서 7분여 만에 옛터에 복원해 놓은 복성재를 둘러보았다. 집 앞에는 가톨릭 쪽에서 그랬는지 성당 비슷한 작은 건물이 꼴사납게 서있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그의 주저인 『자산어보』는 155종의 수산물을 채집, 조사 연구한 것으로 바닷고기의 명칭은 물론 특성, 생태, 성어기, 분포상황 등을 자세히 밝혀 놓은 어족연구의 귀중한 자료다.

정약전은 다산(茶山)의 중형으로 1758년(영조 34) 태어나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을 지냈으나 1801년(순조 1)에 일어난 신유사옥으로 화를 입어 흑산도로 유배되었고, 15년 후인 1810년에 사망하였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로마 교회가 새로운 포교 지역으로 라틴 아메리카와 아시아 쪽에 눈을 돌리면서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들어가 시장개척의 방도를 여러모로 탐색하고 있었는데 조선의 사대사행(事大使行)에 의해 크리스트교가 묻어온 것이다. 인조 때부터 들어 온 흔적이 있으나 숙종 때 널리 퍼졌다. 그 후 북경으로 사행 갔던 사람들의 지식욕과 호기심의 결과로 17세기 초부터 서양서적-마테오 리치(Matteo Ricci) 등 야소회 신부들에 의해 저술된 한문서적-이 들어오게 되었다. 허균이 크리스트교 서적을 가져왔고 이수광이 자기의 저술 속에 『천주실의』를 소개하면서 서학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직방외기(職方外紀)』(줄리오 알레니Giulio Aleni 저) 같은 세계인문지리서가 들어와 읽혀지고 성호(星湖)같은 이들도 서양학문과 크리스트교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였다. 서양학문과 크리스트교는 정치적 관심이나 종교적 신앙보다는 지식층의 학문적 관심 대상이었다. 크리스트교가 점차로 신앙으로서 불만지식층 사이에 퍼져나감에 이르러 전통적 이념 체계는 흔들렸고, 조선사회에 새로운 위협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이익의 제자로서 서양서를 열심히 읽어온 신후담(愼後聃)과 안정복(安鼎福) 등이 이를 정면으로 비판, 배격의 붓을 들 필요를 느끼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청년 지식인들에 의한 자발적인 연구로 크리스트교에 다가갔고, 그 주축을 이룬 이들이 이벽, 이승훈, 권철신, 정약종, 이가환 등 경기 지방 남인이거나 그 후예들이다.

▲복성재

손암 정약전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조 사후 권력을 장악한 노론 벽파들의 계략과 음모가 겹쳐 희생을 당한 것이다. 신유사옥으로 황사영을 비롯한 이가환, 십자가를 처음 들고 온 이승훈 등이 처형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손암과 인척 관계에 있는 분들이었다.

강석 선생의 설명에 의하면 손암은 외딴섬에서나마 정 붙일 만한 언덕이 있었던 것 같다. 같은 죄목으로 강진에 유배된 동생과 이런저런 가사이야기, 학문적인 담론 등 편지 내왕이 잦았는데, 어느 땐가 다산이 소내에 살고 있던 가족을 강진으로 데려오고자 한다는 이야기가 오간 것 같다. 이 일에 대하여 '권모와 술수, 음양(陰陽)이 서로 뒤바뀐 풍속이 있어 결코 자손을 기를 곳이 아닌 곳'이라며 동생을 만류했던 글이 눈에 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흑산도를 비롯한 다도해의 풍광은 환상적이리만큼 아름답다. 지중해 연안과 함께 세계적인 관광지로서 조건을 갖춘 천혜의 보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영해를 무슨 전략기지쯤으로 생각하는 무도한 자들의 안목이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일행은 다시 '면암최선생적려유허비(勉庵崔先生謫廬遺墟碑)'가 서 있는 흑산도 천촌리 입구에서 내렸다. 1924년에 면암의 제자들이 지장암 아래에 이 비를 세웠다고 한다. 지장암은 산에 붙은 자연석인데 면암의 친필이 남아 있어서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구경거리가 되는가 보다. '기봉강산홍무일월(箕封江山洪武日月)'은 이 무렵 면암이 손수 쓴 글씨라고 했다. 기봉은 기자(箕子)에게 봉한 땅이란 뜻이며 홍무는 명나라 태조(주원장)의 연호다.

▲ 면암최선생적려유허비(사진제공=신안군)
▲ 지장암에 최익현이 쓴 '기봉강산홍무일월( 사진제공=신안군)

기봉강산홍무일월을 보고 있자니 문득 송시열이 속리산 자락 화양계곡 바위에 새겨 논 '대명천지숭정일월(大明天地崇禎日月)'이 떠올랐다. 숭정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연호이다. 의종은 어느 때인지는 알 수 없으나 '비례부동(非禮不動)'이라는 휘호를 남겼는데, 이 글은 민정중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취득, 이를 화양동에 있던 우암 송시열에게 바쳤다. 우암은 그 글씨를 화양동 바위에 새겨 놓고 예로 대하였다. 송시열의 후학들 또한 스승의 뜻을 받들어 화양동을 이념의 공간으로 갖추어갔다. 황묘(皇廟), 만동묘가 들어선 것이 그 대표적인 일인데 우암의 제자 권상하가 1703년에 세웠다.

실사(實事)를 떠나 이론에, 행동을 떠나 사색(思索)에 치우치는 것이 조선 중기 이후 학문의 경향이었다. 서경덕, 이황, 이이, 기대승 등 많은 학자들이 나서 성리학을 한층 깊이 연구했는가 하면 우리나라 학계를 주자학(朱子學)의 한 빛깔로 진하게 색칠하였다. 조선의 교학(敎學)을 이제 와서 나무랄 수는 없지만 세종이 만든 한글이 있음에도 이로써 교육의 근본을 삼지 아니하고 지나(支那) 문자인 한자(漢子)를 빌어다 공자의 위패를 모시고 그 앞에서 유교의 경전을 외우고 석전제를 봉행하기를 수백 년 동안 해 왔으니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종의 한글 창제는 지나에 종속되었던 우리의 문화가 비로소 주체적이면서도 독창성을 갖게 된 시발점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자못 크다.

최익현은 경주최씨로 1833년(순조33) 12월 5일 포천(抱川)현 내북(內北)면 가재리에서 아버지 대(垈) 어머니 경주이씨의 둘째로 태어났다. 14세 때 이항로(李恒老)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항일호국운동을 이끌었던 유인석과 유중교, 김평묵 등이 함께 공부한 문도들이다.

화서 이항로는 주자(朱子), 송자(宋子), 시열(時烈)을 정통 유종(儒宗)으로 받드는 분으로 학문의 주지는 문리설(文理說), 이위주이기위객(理爲主而氣爲客)에 있었다. 면암 역시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면암이 대원군에게 반기를 든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만동묘 훼철, 서원철폐, 호포세, 부패관리 처단 등은 특권층의 저항을 불러일으킬 만큼 획기적인 정책이었다. 결과적으로 봉건왕조가 기울어져 가던 시기에 이를 바로 잡으려고 했던 이하응의 개혁의지를 꺾고 민비와 그 척족들이 권력을 장악,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게 되었는데 당시 민승호 등과 일맥상통한 바 있었다는 의구심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가 흑산도로 쫓겨나 가시나무 울타리를 치고 사는 위리안치를 당한 죄가 강화도 조약이 추진되자 이를 반대하기 위해 도끼를 들고 궐문 앞에 엎드려 올린 '척화소'인데 '힘의 약세를 보이면서 적에서 걸화하면 앞으로 적의 침략을 당해날 수 없을 것이며, 우리의 유한한 농업생산품으로 적의 무한한 공업생산품과 교역하게 되면 반드시 경제적 파탄을 초래하고 말 것이며, 이미 금수와 같은 양인(洋人)으로 변한 일인(日人)들과 왕래하게 되면 사교(邪敎)인 크리스트교가 들어와 우리의 전통질서를 무너뜨리고야 말 것'이라는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깊은 우려였다.

제국주의 열강의 우승열패, 약육강식의 속셈을 간파한 탁견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척사위정론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면암 또한 근대지향의식이라던가 국제 정세에 대한 어둠에서 깨어나지 못하였다.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치고 러시아가 연해주를 차지하며 미국이 일본 해안에 대포를 쏘아 대는 등 우리를 에워싼 세계의 형세가 급변을 거듭하건만 우리는 눈을 감고 귀를 막아서 이를 보지 못하고 불행을 자초하고 만 것이다. 19세기 위정척사 혹은 척양(斥洋)이니 하는 서양배격사조는 오래 내려온 전통적인 태도가 아니라 당시의 정세 변동으로 새로 일어난 조류(潮流)에 지나지 않는다.

1905년 10월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매국 대신의 처참을 상소하는 등 투사다운 활동을 계속하다가 마지막으로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김학진(金鶴鎭), 이도재(李道宰), 곽종석(郭鍾錫), 전우(田愚) 등 대관(大官)과 석유(碩儒)에게 호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한 사람의 동조자도 얻을 수 없었다. 그는 전라도 태인의 임병찬 집으로 내려가 3개월여 동안 준비 끝에 그해 4월 13일 그곳 무성서원에서 의병봉기를 선언하고 이 사실을 왕에게 상소하는 한편 국민의 호응을 촉구하는 격문을 보내고 일본(日本)정부에 서한(書翰)으로 통보한다. 장비도 훈련도 없는 적수공권으로 일본 정규군과 맞선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자살행위에 가까웠으며 한낱 시위(示威)에 지나지 않았다.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떠오르고 있는 현실을 외면한 채 동학도 토벌에 나섰던 사람들의 역사의식을 다시금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2시가 조금 지나서야 소재지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2시부터 실학 강좌에 들어갔다. 각기 전문분야에 따라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하고 있어서 크게 호응을 얻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워낙 석학들인지라 하시는 말씀들이 천근 무게로 다가왔다.

호남대 최병현 교수가 10여 년에 걸쳐 『목민심서』를 영역,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출판되었다는 이야기는 축하할 만한 일이다. 5시부터 1시간 30분 동안 선유가 시작되었는데 한여름 밤의 축제였다. 잔잔한 바다 위에 배를 띄우고 연안의 작은 섬들을 돌아보았는데 선장의 해설이 일품이었다. 바위섬을 보면서 박재승 변호사는 보는 방향에 따라서 형상이 다르게 보인다고 했다. 이날의 절정은 서해 낙조였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드는가 싶더니 수평선 너머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는 태양, 타오르던 불길이 한순간에 꺼져버렸다. 바다는 검게 그을린 채 항구의 불빛만 반짝거렸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니 별은 빛나고 태고적 고요가 바람에 날린다. 저녁 바람 등지고서 걷어 올릴 푸른 그물조차 없는데…….

이번 여행의 절정은 흑산도의 만찬이었다. 말로만 듣던 흑산도 홍어와 갓 건져 올린듯한 생선이 잔칫상 같아서 술잔이 흥겹게 돈다. 박 변호사께서 마련한 2차가 더 푸졌는데 이걸 어찌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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