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누정(6) 장춘정(藏春亭)
나주 누정(6) 장춘정(藏春亭)
  • 나천수 (사)호남지방문헌연구소 전문위원
  • 승인 2017.11.02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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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사철 봄기운을 간직한 장춘정
▲ 장춘정(藏春亭)

장춘정은 나주시 다시면 죽산리 969번지에 있으며, 부사(府使)를 지낸 고흥(高興) 류충정(柳忠貞, 1509~1574)이 1561년경에 세운 누정이다. 현재 전라남도 유형 문화재 제201호로 지정되어 있다.

류충정의 아버지 류해(柳瀣)가 나주 다시에 사는 소요정(逍遙亭)의 주인 함풍이씨 이종인(李宗仁, 1458~1533)의 사위가 되면서 처가인 나주에 입향하게 되었다. 이종인도 1494년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사위인 류해도 충무위부사직(忠武衛副司直)을 지냈으며, 류해의 아들인 류충정도 무과에 급제하였으니 대대로 무인 집안임을 알 수 있다. 류해는 부안현감, 강진현감, 김해부사, 장흥부사, 온성부사 등을 지낸 뒤 고향인 나주로 낙향하여 장춘정을 짓고 수많은 문인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 장춘정 현판

전국 4대강 사업 중에 하나인 영산강의 죽산보 하류 쪽에 장춘정이 있고, 죽산보 상류 쪽에 유충정의 외조부인 이종인의 소요정이 있다. 또한 강 건너편에는 나주영상테마파크와 넓은 나주평야가 어우러져 있다.

옛날 직강공사를 하기 전 영산강의 모습은 마치 용이 용트림하여 승천하는 급회전 물굽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오로지 장춘정에서만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또한 누정을 둘러 싼 노거수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그리고 동백나무 숲이 한 폭의 동양화와 같아 시인묵객들이 이곳의 풍경을 자주 읊기도 하였던 곳이다.

▲ 고봉 기대승의 장춘정 기문

고봉 기대승(1527~1574)의〈장춘정기문(藏春亭記文)〉에 보면 기대승과 류층정 간에 대화에서 장춘의 의미를 문답(問答)한 내용이 있다. 먼저 기대승이 “1년의 봄은 3개월뿐인데 지금 ‘봄을 감추어 보관하였다[藏春]’하였으니, 여기에 대한 설명이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류충정이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그러하다. 4시(時)와 8절(節), 24기(氣)와 72후(候)가 1년 가운데 돌고 있으며 육합(六合) 밖에 나타나고 있는 것을 사람들은 다 측량하지 못한다. 다만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아 기억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동풍이 불어 얼음이 풀리면 숨어 있던 벌레들이 비로소 나오는데, 소양(小陽)의 기운이 모두 지상(地上)에 통달한다. 그리하여 복사꽃이 비로소 피고 꾀꼬리가 욺에 이르면, 천지의 원기(元氣)가 가득하고 온갖 꽃들이 꽃봉오리를 드러낸다. 아름다운 숲은 땅에 덮여 있고 꽃들이 울긋불긋 곱게 피니, 산은 마치 단장하여 화려한 듯하고, 물은 마치 담박하여 멀리 있는 듯이 보인다. 한낮의 햇빛은 더욱더 눈부시고 푸른 하늘은 더욱 넓으니, 이것은 바로 봄 한때의 좋은 기회로, 옛사람들이 시름을 잊고 감상했던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맹꽁이가 한 번 울어 축융(祝融)이 때를 다스리게 되면 지난번 봄이었던 것이 바뀌어 여름이 된다. 그러하니 봄은 진실로 감추어 둘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유독 내 누정만은 그렇지 않다. 기이한 화목(花木)이 무려 수십 종(種)이 모여 있는데, 종류마다 각기 수십 그루가 된다. 그리하여 뿌리가 서려 있고 잎이 맞닿아 있으며, 가지가 어우러져 있어서 붉은 꽃이 지면 흰 꽃이 남아 있고, 청백색의 꽃이 드리워 있는가 하면 노란 꽃이 피어 있으니, 비록 시절이 바뀌어도 꽃이 피는 것은 쇠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한 겨울에도 푸르른 나무가 있어서 처마 가에 푸름을 나타내고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우고 있으며, 왕왕 외로운 향기를 풍기는 차가운 꽃이 햇볕에 예쁘게 피어 봄기운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 때문에 내 누정에 들어오는 자들은 항상 봄의 기운이 이 사이에 있는 듯이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의 누정을 ‘장춘정(藏春亭)’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라 하였다.

꽃이란 봄에 피는 꽃, 여름에 피는 꽃, 가을에 피는 꽃, 겨울에 피는 꽃이 있는데, 류충정은 꽃은 봄에만 피는 것으로 보고, 사시사철 꽃이 피니 사시사철 봄기운이 돋는 것이므로 봄철이 지나면 꽃나무 속에 봄을 감추어 놓았다가 여름에 봄기운을 돋게 하고, 가을에 돋게 하고, 겨울에 돋게 한다고 설파하였으니, 그야말로 봄을 감추어 놓았다가 철마다 피게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당시에 장춘정 뜨락에는 사시사철 꽃이 피는 기화요초가 있었다.

한편, 기대승의〈장춘정기(藏春亭記)〉에 “또 누정의 서쪽 노는 땅을 개척한 뒤 작은 집을 짓고 ‘매귤(梅橘)’이라 써 붙였는데, 모두 난간을 세우고 단청(丹靑)을 입혀서 영롱하고 완연하며 아늑하고 상쾌하여 별천지와 같다. 이에 여러 명승지에 대해 쓴 시편(詩篇)을 판각(板刻)하여 편액을 걸고, 아울러 나의 기문(記文)을 걸어 놓으려고 하였다”라는 글이 있다. 이 때문에 장춘정에는 매귤당을 읊는 편액이 있다.

류충정의 아들인 유주(柳澍, 1536~1588)도 1561년 문과에 급제하여 1582년 청도군수를 역임하고, 최종관직은 정3품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낸 후 낙향하여 나주 보산사(寶山祠)에 보산팔현 중에 한사람으로 배향되었다. 함풍이씨 이종인의 사위로 처가인 나주에 뿌리내려 고흥류씨가 대대로 벼슬을 해온 것이다.

장춘정에는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1527~1572)의 원운시가 있다. 그러나 《고봉집》에는 〈차운류첨사강정(次韻柳僉使江亭)〉이라 하였다. 이 말은 누정 주인인 류충정이 지은 원운시를 차운하였다는 뜻인데, 안타깝게도 현재 류충정의 원운 시는 알 수 없다. 그래서 고봉 기대승의 〈장춘정기〉 말미에 써진 장춘정 시를 원운 시로 한 듯하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그마한 집 깨끗하게 벼랑을 깎아 열었는데                                    小堂淸絶鑿崖開

귤나무 푸르디푸른 빛이 술잔에 비치네.                                          橘樹蒼蒼映酒盃

안개노을을 토해내는 산은 천고 빛인데                                           山吐烟霞千古色

청풍명월을 흔드는 강은 한꺼번에 흘러오네.                                     江搖風月一時來

봄 창가에서 외로운 휘파람새들이 서로 화답하고                               春窓孤嘯鳥相和

저물녘 거룻배에 가벼운 도롱이 옷은 물고기도 의심을 하지 않네.          晩艇輕簑魚不猜

절로 우습구나, 동쪽 이웃이 나를 게으른 객이라고 멀리하는데             自笑東隣疎懶客

복건을 쓰고 흥에 빠져서 몇 번이나 배회하였나.                               幅巾耽興幾徘徊

   
▲ 강백년의 장춘정 팔경시
   
▲ 면앙 송순의 작품

대체로 누정의 시판을 보면 누정 주인이나 그 후손들의 교유인물을 파악할 수 있는데. 장춘정에 걸린 시판의 시를 보면 대사성 기대승, 이조판서 오상(吳祥, 1512~1573), 관찰사 안위(安瑋, 1491~1563), 연파 박개(朴漑, 1511~1566), 승문원 정자 임복(林復, 1521~1576). 대사성 양응정(梁應鼎, 1519~1581), 석천 임억령(林億齡, 1496~1568), 영의정 박순(朴淳, 1523~1589), 부승지 박창수(朴昌壽, 1827~1897), 백호 임제(林悌, 1549~1587), 좌찬성 강백년(姜栢年, 1603~1681) 등으로 당대의 고위직들이 대부분이다.

▲ 면앙 송순의 작품

그런데 장춘정에는 면앙 송순(俛仰 宋純, 1493~1582)의 시 2수가 게시되었는데, 그 중에 제 1수는 나주 장춘정을 읊은 시가 아니라, 전라북도 태인에 있는 장춘정을 읊는 시이다. 송순의 면앙집을 보면 ‘장춘정은 태인의 옛 현에 있으며 눌암 송세림(宋世琳)이 지었다[亭在泰仁古縣, 卽訥庵宋公世琳所築]’라는 글로 보아, 후세에 시판을 제작하면서 나주의 장춘정 시로 오해한 듯하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 작품을 제외한 나주 장춘정을 읊는 제 2수만 소개하고자 한다. 이 시는 송순의《면앙집》에 보면 ‘부안태수 유충정의 매귤당을 쓰다. 나주에서 산다[題柳扶安 忠貞梅橘堂 居羅州]’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다.

위태로운 벼랑을 다 쪼개 명승 구역으로 만들어                                  斷盡危崖作勝區

난간 기대어 날마다 지나는 배를 전송하네                                        憑欄日日送行舟

섣달을 지내면 백설인지 매화인지 향기가 헷갈리는데                          香迷白雪梅經臘

가을이 되면 귤은 황금 빛만을 빼앗아 가구나.                                   色奪黃金橘有秋

천하에 매귤당(梅橘堂) 같은 품격(品格)이 다시없으니                         天下更無同品格

인간이 마땅히 풍류를 차지해야 하네.                                             人間宜得擅風流

한 누정에서 서로 마주하여 술동이를 여는 곳엔                                 一堂相對開樽處

모름지기 창랑의 옛 낚시 동아리를 기억해야 하네.                             須記滄浪舊釣儔

▲ 안위의 작품

안위(安瑋)는 1518년부터 1년간 전라도 관찰사로 역임하였을 때 유충정은 부안 현감으로 있었다. 안위는 장춘정 시에 짧은 서문을 달았는데, “장춘정 주인은 나의 휘하에 있는 막료의 한 사람이다. 이 해 6월에 칠산바다의 왜적 전선을 포획하였기 때문에”라는 구절이 있어 류충정의 왜적 물리치는 전공을 짐작할 수 있다.

영산강 변에 수많은 누정이 있지만 시인묵객들이 해당 누정의 8경 또는 10경을 읊은 곳은 유일하게 유충정의 외조부가 건립한 소요정 10경, 그리고 강백년이 읊는 장춘정 8경과 후손 류후(柳㴟)가 읊은 장춘정 8경의 시가 있다. 이는 당시 장춘정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그만큼 아름다웠음을 말해준다. 참고로 강백년의 장춘정 8경을 노래한 시는 《설봉유고(雪峯遺稿)》 권11에 〈장춘헌 8경(藏春軒八景)〉으로 수록 되어 있다.

한편, (주)시민의소리와 (사)호남지방문헌연구소에서는 담양군과 화순군에 이어 나주의 주요 누정 인 쌍계정, 석관정, 장춘정, 기오정, 영모정, 금사정, 만호정, 벽류정에 걸린 모든 현판을 탈초 및 번역하여 현판완역집 간행과 홍보 영상물 제작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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