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진 마음
얼룩진 마음
  • 문틈 시인/시민기자
  • 승인 2017.11.02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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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한 지인의 아들 결혼식이 벌써 전에 있었다. 소식을 몰라 참석을 못했다. 한참이 지난 뒤에 우연히 전에 다니던 직장의 회보를 보고서 그 소식을 알게 되었다.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된 거냐며 서운하다는 말을 했더니 청첩장을 보냈으나 반송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새 내가 이사를 가서 그리 된 모양이었다. 나는 맥이 풀렸다. 여느 사람들처럼 휴대폰을 통해 내게 다시 알릴 수도 있었으련만 그러지 않았다는 것에 감정이 묘하고 언짢았다. 한편 지인의 입장에서 볼 때 반송된 청첩장을 두고 다시 전화로 메시지를 보내기가 뭣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째야 할지 참 난감하다. ‘지난 것의 법칙’, 즉 지난 것은 이미 지난 것이니 흘려보내야 할까. 그러기에는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다음에 만날 때 축의금 봉투를 건네 늦게나마 축하의 뜻을 표해야 할까. 그러자니 무언가 겸연쩍기도 하고, 지난 것의 법칙에 어긋난 쑥스러운 일 같기도 하고.

그보다 더 전엔 이런 일도 있었다. 내 구닥다리 휴대폰이 말썽을 부려 근 두 달 가까이 일체의 긴 문자 메시지가 들어오지 않았다. 휴대폰에 지우지 않은 문자 메시지들이 가득 차 있었던 탓에 긴 메시지들이 수신되지 못한 것이다.

통신사에 항의를 하고나서야 내 휴대폰에 그런 맹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새 여러 지인들로부터 모임, 청첩, 부고 관련 메시지가 내게 왔으나 나는 그 사실들을 까맣게 모르고 지냈다.

본의 아니게 지인들의 이런저런 대소사 일에 예를 표하는 일을 그만 ‘패싱’하고 만 셈이다. 일일이 당사자들에게 내 휴대폰 탓을 말할 수도 없고, 여러 지인들에게 무심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스스로를 달랠 수밖에 없었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이제 새 주소가 생기면 나와 그물코로 연결된 여러 곳에 알려야 한다. 지인들, 은행, 보험회사,전 직장 사우회, 그리고 또 어디 어디. 그런 일이 귀찮다. 그리고 휴대폰이 말썽을 부리지 않도록 수시로 문자 메시지를 지워야 한다. 이런 일이 성가시다.

그런데 그런 일들을 소홀히 했다간 이처럼 낭패를 볼 수 있다. 소식이 도달하지 못해 벌어지는 감정 소동이다. 어쨌거나 내 부주의든 어느 쪽의 실수든 이렇게 서운한 일이 가끔 생겨난다. 사람살이가 쉽지 않은 대목이다.

살다보면 이런 소소한 일들 때문에 오해받을 수 있다. 내 두 아들의 결혼식 때 오지 않은 지인이 있었다. 큰 아들 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둘째 때도 오지 않았다. 그럴 수 있다고 넘겼다. 설사 세 번, 네 번의 경우가 있었더라도 그때마다 무슨 일이 있어서 지인이 못 올 수도 있는 것이 사람의 일이다.

그걸 가지고 속 좁게 꿍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은 후 어느 모임에서였던가 그 지인을 만났다. 여사여사해서 지난 번 경사에 못 갔노라고 뒤늦은 축하 인사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모른 척한다. 예상 밖의 장면에 내가 당혹스러웠다.

뭐, 그럴 수도 있으려니 했지만 마음 한 구석은 도무지 그렇지 못해 불편했다. 나는 갑자기 좀팽이가 되어버린 셈이다. 그 후부터 나도 모르게 그 지인과 서먹서먹해지고 말았다. 실 끊어진 연처럼  점점 멀어져가는 듯한 느낌. 이 마음의 가벼움이라니. 이 속 좁은 마음이라니. 사람 마음이란 한없이 넓다가도 어떤 때는 바늘 하나 꽂을 데도 없는 것이라더니 내가 딱 그 짝이 된 셈이다.  

속에 있는 나는 자꾸만 그런 것에 붙들려 서운함을 마음속에 담아두지도 말라고 나를 달랜다.그런 대수롭지 않은 일을 마음에 두면 삶이 팍팍해진다고 말린다. 나는 이 세상에는 별의별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깨우쳤다. 그만한 일로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될 일이라고. ‘지난 것의 법칙’을 다시 새겼다.

언젠가 91세 된 러시아 동포 고려인을 만난 일이 있었는데 그 분에게 장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 분은 이렇게 대답했다. “누가 내게 어떻게 하든 신경 쓰지 않는 것이오.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질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사는 것이오.” 그러면서 우크라이나에서 고려인으로 고생하며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나가면 다 잊혀지고 가라앉게 된다는 이야기였던가. 도통한 사람 같은 이야기에 수긍이 가면서도 그렇게 살기가 어디 쉬운가 싶기도 했다. 대저 삶이란 끊임없이 마음이 시험받는 과정 같기도 하다.

그 후로 나는 청첩장이 오거나 휴대폰에 길흉사 문자 메시지가 뜨면 가능한 한 예를 표하기로 한다. 설령 나와 별로 친한 관계가 아니라 할지라도 내게 청첩을 보냈는데 무시한다면 보낸 이는 얼마나 서운해할까봐서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들어서 몇 번 심란한 적이 있지 않았던가. 내 마음이 얼룩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 편을 택한다.

인간끼리의 관계 맺기, 이것이 참 어렵고, 조심스럽고, 난감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스님들은 이런 작은 세상일에 마음이 얼룩지지 않아 좋을 것 같다. 속인이 사는 일이란 이렇듯 매양 서투르기만 하니 젊은 시절 한때 그리워했던 산문(山門)이 불쑥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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