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호남선비를 만나 내일을 이야기하다(6)-유희춘, 송순
오늘 호남선비를 만나 내일을 이야기하다(6)-유희춘, 송순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7.10.30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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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숲 맑은 담양, 호남 가사문학의 산실

생태와 인문학이 살아 숨 쉬는 전남 담양군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명망가들이 머무르며 가사문학을 꽃피운 고장이다.

2018년은 ‘전라도’라는 명칭을 부르게 된지 천 년이 되는 해다. 담양이라는 지명도 고려 현종9년(1018년)에 처음으로 불리게 됐다. 그렇게 담양이라는 지명은 사라지지 않고 천년의 역사와 함께 자라왔다.

<시민의소리>는 지난 10월 28일 ‘오늘 호남선비를 만나 내일을 이야기하다’의 마지막 여정으로 미암 유희춘(柳希春) 선생과 송순, 정철 선생을 알아보기 위해 담양 시문학의 근거지인 면앙정(俛仰亭), 송강정(松江亭)으로 길을 떠났다.

광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쉽게 갈 수 있는 담양이지만, 오월어머니집 회원들과 함께 역사문화탐방을 떠나 활기차게 시작할 수 있었다. 이날 일정은 조성식 문학박사와 박민숙 문화관광해설사가 동행해 알기 쉽게 오래된 역사를 풀어나갔다.

미암 유희춘, 담양출신 아내를 맞이하다

첫 번째 여정은 담양군 대덕면에 위치한 미암박물관에서 시작됐다. 미암박물관에서는 미암일기와 유희춘(柳希春 1513∼1577) 선생의 부인 송덕봉 시인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입장이 무료인 미암박물관은 한옥으로 정갈하게 꾸며졌고, 내부 콘텐츠도 꽤나 잘 정리되어 있어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미암(眉巖) 유희춘 선생의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이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13년 해남에서 태어났다. 부친 유계린(柳桂鄰)과 탐진최씨의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부친에게 가학을 전수받았고, 약관의 나이에 광양출신의 유학자 최산두(崔山斗)를 찾아 글을 배웠다.

유희춘은 1536년 24세때 담양출신인 송덕봉(宋德峰 1521∼1578)을 아내로 맞이했다. 송덕봉은 여류시인으로 담양에서 태어났다. 송씨는 ‘덕봉집(德峯集)’이라는 시문집(詩文集)을 남길 정도로 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박민숙 문화관광해설사는 “미암의 학문에 만족해 결혼을 결심했던 송덕봉은 유난히 키가 작은 미암과의 혼인을 가족들이 반대하자 버선을 도톰하게 신고 오도록 했다는 일화가 알려져 있다”며 “남편 유희춘과 인문학적으로 소통하면서 가정을 공동으로 경영하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설명했다.

조선시대 생활상 모두 담은 '미암일기'

미암은 1537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38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수찬, 정언 등을 지냈다. 그러다 1546년 을사사화가 일어나 파직되어 귀향가게 됐다. 이후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제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으나 고향인 해남과 가깝다는 이유로 다시 함경도 종성으로 이배되기도 했다.

유희춘은 하서 김인후와 우정이 남달랐다. 이들은 어린시절 최산두 밑에서 동문수학을 하며 지냈다. 미암이 유배를 떠나게 되자 하서는 “자네의 아들을 사위로 삼을 테니 걱정마시게”라는 말을 하고, 후일 하서의 딸을 유희춘의 아들에게 시집을 보내 사돈지간이 됐다.

19년의 유배생활동안 미암 유희춘은 이황과 서신교환을 통해 주자학에 대한 토론을 계속했고, 지방 유학생들을 가르치곤 했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한 뒤 사면되어 지제교, 대사성, 전라도 관찰사, 이조참판 등을 지내고 담양으로 내려와 지내게 됐다.

미암이 55세부터 약 11년에 걸쳐 쓴 ‘미암일기(眉巖日記)’는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승정원이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사료를 미암일기와 미암집을 토대로 다시 선조실록을 기록했었기 때문이다. 현재 미암박물관에 가면 미암일기와 미암집 목판 등이 전시되어 있다.

미암일기는 관직생활과 학문에 대한 기록뿐만 아니라 아내와의 애정, 당시 가족 생활상을 속속들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기록물로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 조선중기의 정치, 경제, 일상생활, 사상, 문학 등을 살피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 미암일기 및 미암집목판은 보물 제26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렇듯 미암 유희춘은 이황, 김인후 등과 함께 호남지방의 학풍을 조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미암박물관에서 유희춘의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 일행들은 담양군 고서면에 위치한 송강정(松江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미인곡, 속미인곡 탄생한 송강정

송강정에 오르기 위해 담양의 유명 숯불갈비 식당 바로 옆에 위치한 공영주차장을 이용했다. 송강정 방문객을 위한 공영주차장이 자리하고 있지만, 옆 식당 주차장과 구분이 모호해 방문객들에게 어려움을 주고 있었다. 방문객을 위해 별도의 표지판이 눈에 띄도록 설치되어야 한다는 볼멘소리가 삐져나오고 있었다.

또 주요 문화재·관광지·명소임을 알려주는 갈색 표지판은 실제로 송강정이 위치한 자리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식당자리를 가리키고 있어 위치조정이 필요해 보였다.

오월어머니집 회원들과 함께 송강정을 오르면서 송강 정철(鄭澈) 선생의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떠올려봤다.

임금을 사모하는 마음을 여인의 마음에 빗대어 지어진 정철의 이 주옥같은 작품들은 다양한 표현과 절묘한 언어 구사, 문학성이 두드러져 현재까지도 고등학교 수능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작품이다.

송강 정철(1536~1593)은 우리에게 가사문학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정철은 1584년 동인의 탄핵을 받아 대사헌직에서 물러나 4년간 창평(昌平)에서 은거생활을 했다.

그렇게 송강은 담양에서 ‘죽록정(竹綠亭)’이라고 불리는 초막을 짓고 살았고, 유수한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그 자리에 후손들은 정철을 기리기 위해 1770년 쓰러진 정자를 다시 세우면서 ‘송강정’이라 이름을 지었다. 송강정은 앞면 2칸 옆면 3칸 규모의 정자다. 현재 죽록정이라는 편액도 함께 걸려있다. 정자 바로 옆에는 사미인곡 시비가 서 있다.

송강정 주변에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바로 앞에는 송강이 흐르고 있었다. 박민숙 문화관광해설사는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놓은 이유는 '나는 임금을 향해서 절개를 지키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면앙정, 호남 가사문화의 근거지

송강정에서 내려와서 일행들은 송순(宋純)이 후학을 기르던 면앙정(俛仰亭)으로 이동했다. 면앙정은 송강정보다 더 가파른 곳에 위치한 탓에 수많은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기 때문에 등반이 가능한 몇몇 오월어머니집 회원들만 함께 오르기로 했다.

면앙정은 담양군 봉산면 제월봉 아래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송순(1493~1583)은 담양에서 태어나 중종 14년(1519) 별시문과 을과에 급제한 인물이다. 그는 대사헌, 이조참판, 전주부윤, 나주목사를 거쳐 의정부 우참찬 겸 춘추관사를 지내다 관직생활을 접고 담양으로 내려왔다.

송순은 77세때 50년간의 관직생활을 접고 담양으로 내려와 자신의 호를 따 면앙정을 짓고, 유유자적하게 지내며 후학을 길러냈다.

그는 이곳에서 퇴계 이황(李滉)을 비롯해 강호제현(江湖諸賢)들과 학문이나 국사를 논하기도 했으며, 기대승, 고경명, 임제, 정철 등의 후학을 길러냈다.

송순이 지은 ‘면앙정가’는 사계절 면앙정 주변의 산수의 아름다움을 노래해 정극인의 ‘상춘곡’과 함께 호남 가사문학의 계보를 잇게 된다. 후일에 정철의 ‘성산별곡’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조성식 문학박사는 “송순은 90세까지 아주 오래 살다 간 인물이다”며 “면앙은 땅을 굽어보고 하늘을 우러러보아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면앙정에 오르니 탁 트인 경관으로 멀리 추월산의 모습이 한눈에 조망되어 가히 당시의 풍류가 느껴지는 듯 했다.

송순이 나이 87세때는 회갑연을 치르듯 과거급제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회방잔치가 면앙정에서 3일 밤낮으로 열렸다고 한다. 조 박사는 “정철, 임제, 고경명, 이후백 등 제자들이 스승인 송순을 가마에 태우고 언덕을 내려갔다”며 “후일에 제자들의 아름다운 마음이 전해져 전라도 과거시험으로 ‘하여면앙정, 면앙정을 논하라’라는 시험문제가 나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송순은 50년의 관직생활 중 4명의 임금을 모시는 동안 귀향을 딱 1번만 갈 정도로 관용과 대도의 삶을 지낸 선비였다.

그렇게 송순의 삶은 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 살다간 호남 선비로 추앙받고 있었다.

*이 캠페인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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