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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정의롭고 관용하여’ 함께 가자(5)조선물산장려운동의 실패
이홍길 고문  |  siminsori@siminso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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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0.30  11: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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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홍길 고문

건축왕 정세권의 평전에 그의 동지로 민세 안재홍이 중요하게 소개되고 있었다. 민세 안재홍은 1920년대에 조선물산장려회, 신간회, 조선어학회 활동에서 중추적 역할을 맡은 언론인이자 정치인으로, 해방정국에서는 민정장관과 건준 부위원장을 맡고 국민당을 창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김성수, 조만식 등과 함께 1920년대에 걸쳐서 경제자립운동을 펼쳤는데, 운동의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정치 지형이 다르고 운동주체들의 조건이 다른 것이 실패의 총체적 원인이 되었다. 개인에게도 성공은 삶을 긍정케 하여 낙관적 전망을 갖게 하지만 집단이나 보다 큰 규모의 공동체에게도 성공 여부는 다음 활동의 적극성과 소극성을 가르는 트랜드를 만드는가 싶다.

3.1운동은 헌법사항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불멸의 이정표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막대한 희생과 참담한 실패를 가져다주었다. 분노와 비애가 엇갈리는 가운데 물리적 투쟁을 통한 독립을 어렵다고 보고 투쟁보다는 실력을 길러 훗날에 대비하자는 실력양성론이 나오고, 그 가운데 독립에 대해서 비관적 전망을 하는 사람들은 자치론으로 기우는 민족운동의 분화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물산장려운동이 분화의 빗장을 열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호경기로 일본의 독점자본은 급성장하여 조선에 적극 진출하기 위하여 회사령을 개정하였는데, 그 결과로 조선인 자본가에게도 기회가 주어졌고 이는 일제가 문화통치를 시작하는 생색내기 정책이 되기도 하였다. 1919년에서 1920년에 이르는 기간에 조선인들 사이에 회사설립 붐이 생겼던 것도 그러한 분위기에 편승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대자본을 상대하여 소규모의 조선인의 자본이 경쟁력을 갖출 수 없음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조선인 자본가들은 1921년 6월 조선인산업대회를 열어 총독부에 ‘조선인산업정책’을 호소하였으나 거절당했고, 설상가상으로 1923년부터는 일본과 조선 사이의 무역에서 면직, 주류를 제외한 모든 상품의 관세가 면세될 방침이었다. 군사정권하에서 우리들이 경험한 기울어진 정치운동장의 경제적 영향도 그 차별을 감당하기 어려웠는데 식민지 권력이 조성한 정치운동장은 기운 것을 넘어 차라리 전도된 것이었다.

가중되는 위기 속에 조선인 자본가들과 민족운동 세력들은 민족감정을 앞세워 조선인 자본이 민족자본임을 선전하며 민족자본을 보호하자고 민중들에게 절규하였다. “조선사람, 조선 것”,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 먹고 입고 쓰자”가 그 애절한 구호들이었다. 운동은 1922년 말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1923년 초에 절정에 이르렀으나, 그 후반기에 운동의 동력이 떨어지게 되었다. 빈약한 생산력으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갈 수 없어 결과적으로 물가만 올려놓았고, 그 부담은 가난한 민중에게 안기게 되었다. 1원 60~70전 하는 상품을 3원의 높은 가격으로 사게 되어 이익은 조선인 자본가, 상인이 가져가고 부담은 민중이 지게 되었다.

물산장려운동은 생산증식 논리와 토산장려의 논리로 나뉘는데, 각 논리의 정당성 여부와는 상관없이 피식민 상태의 조선인의 경제자립운동은 일본의 대자본의 맞수가 될 수 없었다. 물산장려운동의 생산증식 논리는 1920년대 중반의 민족개량주의로 발전하고 토산장려의 논리는 절대독립론의 비타협주의 좌파민족주의로 발전하였다.

생산증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동아일보 계열로 소수의 공업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실력양성의 외양을 갖추었지만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려는 반제논리가 없어 총독부와 타협의 가능성을 전제한 셈이었다. 총독부는 1923년 말 경성방직에 거액의 보조금을 지급하여 1935년까지 계속하였다. 물산장려운동의 실패의 교훈은 총독부가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식민지 구조에서 제한된 권력이라도 필요로 하였고 이는 자치론, 자치운동으로 나타났다.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이 그 백미였다,

안재홍의 토산장려도 실력양성론에 기반하지만 조선인 공업생산이 다소 우세했던 소공업과 가내공업 등 중소자본을 육성하고 토산을 장려하자는 주장이었다. 자본주의 근대화를 주장하지만 일제에 예속되는 근대화를 배격하면서 중소자본을 토대로 민족경제를 구축하는 조선식 자본주의 근대화를 추구하여, 일제에 기생하는 자본주의를 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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