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호남 선비, 백호 임제를 재평가한다(6)
길 위의 호남 선비, 백호 임제를 재평가한다(6)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7.10.23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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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나주 백호문학관을 두루 살펴보다가, 한 곳에서 「부벽루상영록(浮碧樓 觴詠錄)」 전시물을 보았다. 1584년 겨울에 임제는 평안도 도사의 임기를 마치고 떠날 즈음에 병을 얻어 상당기간 객사에 머물렀다. 이 때 임제는 황징 등 5명의 친구를 초청하여 평양 대동강 부벽루에서 시회(詩會)를 열었는데, 서로 주고받은 시들을 모아 엮은 책이 「부벽루 상영록」이다.

「부벽루 상영록」에는 백호가 직접 쓴 서장과 원운 15수와 5명의 차운 시가 실려 있다. 1)

그러면 임제가 직접 지은 서장을 읽어보자.

서장 (序章)

제(悌)는 서경의 막객으로 있다가 임기를 마치고

떠날 즈음 병을 안고 홀로 무료히 앉아서

공중에다 글자를 그리고 있었다.

우연히 김이옥 · 이응청 · 황응시 · 김운거 · 노경달 등과 호사(湖寺)의 약조를 하여, 동짓달 초순 병이 뜸할 때 나가 놀기로 했다.

마침 속사(俗事)에 응하는 일이 생겨 어둠을 타고서 부벽루에 이르렀다. 산은 높고 달은 조그만데 물의 수량이 떨어져 돌이 드러났다.

바로 소동파의 「후 적벽부」에서 놀던 강물이었다.

이에 함벽에서 술 마시고 영명사(永明寺)에서 묵었다.

때는 만력 12년 갑신(1584년)이다.

이를 보면 임제는 평양의 대동강 변 청류벽 위에 높직이 있는 부벽루에서 5명의 친구들과 수창했음을 자세히 알 수 있다. 2)

 

그러면 백호 임제의 원운 제1수를 음미해보자.

바람차고 물 같은 밤에

비껴진 달 아래 난간에 기대어 있네.

갈대숲 사이로 어부의 불빛이 비칠 제

먼 포구에는 돌아오는 배 한 척.

風冷夜如水

月斜人擬樓

疎林見漁火

遠浦有歸舟

 

다음은 호서 김운거의 차운이다. 압운은 2,4구의 루(樓)와 주(舟)이다.

강가의 나무에 말을 매어 놓고

땅거미 깃든 강위의 누각에 오르네

아득히 저 멀리 한 점 불빛이 보이는데

이는 고기잡이 배인 듯하네.

 

이어서 국헌 황응시의 차운을 보자

계곡과 산이 더 없이 아름답고

긴긴 이 밤 높은 망루에 기대어 있네

명멸하는 어화와 인가의 불빛이

십리 밖 저 남쪽 호수에 떠 있는 돛배들인가 하노라

 

세 번째로 남파 노경달이 읊었다.

술통에는 한 잔의 술이 들어 있고

강변의 천척이나 되는 누각 우뚝 솟아있네

손에 손을 잡은 우리의 우정 끝없이 깊어만 가거늘

말하지 마오, 돌아오는 돛배가 있다고

 

이어서 송오 이응청의 시이다.

고려 때부터 융성했던 절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고려 때 누각의 하늘은 높아라.

강의 별빛이 깜박이는 곳이

저 멀리 고깃배의 불빛이 아니냐.

 

마지막으로 경호 김이옥이 차운하였다.

조각달 비치는 저 황패한 옛 성곽

강 가운데 서있는 저 누각 그림자만 드리우네.

망대에서 보이는 저 모닥불은

남포(南浦)의 외로운 쪽배 아니냐.

 

이런 시를 백호는 영명사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15수나 수창하였다. 성리학이 지배하는 조선시대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시회(詩會)를 통하여 여흥을 즐겼다.

한편, 백호 임제가 친한 사람들과 창수한 기록은 「용성창수록」, 「부벽루 상영록」 이외에 3번이나 더 있다.

1574년에 임제는 양대박(1543∼1592), 정지승(1550∼1589)과 함께 서울 근교 삼각산 일대를 유람하고 시를 지었다. 이때 창수한 기록이 바로 「정악(鼎岳, 삼각산의 별칭)창수록(唱酬錄)」이다.

백호는 1575년부터 관원(灌園) 박계현(1524~1580)과 시를 주고받았는데 이 시집이 「관백창수록」이다. 1575년에 임제는 속리산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나주에 왜구의 침입 소식을 듣고 참전하고자 나주로 내려와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을 만났다.

1579년에 임제는 함경도 고산도(함경남도 안변) 찰방으로 부임했다. 이때 양사언, 허봉, 차천로와 함께 가학루(駕鶴樓)에 올라 시를 지었다.

요컨대, 임제의 「창수록」들은 그와 교유한 사람들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다.

▲ 백호문학관에 전시된 ‘부벽루 상영록’

1) 이 문집은 황응시와 이응청의 후손이 소장한 것을 조우인의 후서를 받아 1627년에 출간하였다. 「부벽루 상영록」은 일본인 나카이 겐지(1922∼2007)가 평석하였는데 2016년에 한글판(나카이 겐지 저 · 여순종 역, 부벽루 상영록 평석)도 발간되었다.

2) 평양 부벽루는 영명사의 누대로 임진왜란 때 불타서 1614년에 중건되었다. 그런데 영명사는 1950년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지고 그 자리는 요양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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