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누정(3) 쌍계정(雙溪亭)
나주 누정(3) 쌍계정(雙溪亭)
  • 나천수 (사)호남지방문헌연구소 전문위원
  • 승인 2017.10.11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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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3대 명촌에 자리한 쌍계정에서 향약을 논하다
▲ 쌍계정

쌍계정(雙溪亭)은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반송마을에 있으며 고려 충렬왕 때 정가신(鄭可臣)에 의해 창건 되었다하나 확실한 건립연대는 미상이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어 있다. 1601년, 1652년, 1796년, 1938년 등에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단층 맞배 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형 구조로 되어 있다.

정가신(鄭可臣)은 고려 원(元)간섭기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나주(羅州), 나주 출생으로 자는 헌지(獻之)이다. 고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 정5품)을 역임하고 1290년(충렬왕 16) 세자가 원나라에 갈 때 세자의 스승으로서 민지(閔漬, 1248-1326)와 함께 수행하였다.

1291년(충렬왕 17)에 정당문학(政堂文學, 종2품)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성절(聖節)을 축하했으며, 첨의찬성사 세자이사(僉議贊成事世子貳師, 정2품)에 임명되었다. 나주 금안리(金鞍里)는 중국에서 한림학사를 지낸 정가신이 황금 안장에 백마를 타고 금의환향을 한데서 동명의 유래가 생겨났다. 금안리는 정읍의 태인, 영암의 구림과 함께 호남의 3대 명촌으로 꼽힌다.

▲ 정가신의 작품

고려 때는 문정공 정가신(鄭可臣, 1224-1298), 문숙공 김주정(金周鼎, ?-1290), 문현공 윤보(尹珤, ?-1329)가 학문을 닦던 곳이라 하여 삼현당(三賢堂)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나주정씨 정서(鄭鋤), 고령신씨 보한재 신숙주(申叔舟), 서흥김씨 죽오당 김건(金鍵), 풍산홍씨 반항당 홍천경(洪千璟)이 등이 학문을 연마하던 곳으로 알려졌다.

특히 금안리는 또한 신숙주의 고향이란 점에서 더욱 유명해졌으며, 현재 신숙주 생가 터를 관광자원화하기 위하여 터를 확보하고 큰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쌍계정은 나주의 진산인 금성산(錦城山)을 끼고 이름 그대로 두 개의 하천이 정자 옆으로 흐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쌍계정 현판은 한호(韓濩, 1543-1605, 호 석봉)가 썼다고 알려져 있으며, 쌍계정을 관리하고 있는 사성문중(四姓門中)을 기리기 위해서 1957년도에 사성강당(四姓講堂)이란 큰 현판도 게시하였는데, 네 성씨는 나주정씨, 하동정씨, 서흥김씨, 풍산홍씨이다.

▲ 사성강당

쌍계정에 걸린 다수의 작품들

고려 때 건립한 정자로 고려 때 인물의 시판이 게시된 곳인 쌍계정은 그 누정과 누정문학의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하겠다. 나주정씨의 정우권(鄭遇權), 하동정씨의 정봉채(鄭琫采), 서흥김씨의 김종섭(金鍾燮), 풍산홍씨의 홍경식(洪暻植) 등은 모두 1900년대 인물로 이들이 쓴 누정기(樓亭記)에는 “매년 춘추로 두 계절에 강학의 모임을 열어 여러 어진 이들이 모이기 때문에 옛날 난정수계(蘭亭修禊)의 기풍이 없지 않고, 또한 한 골목의 이웃끼리 서로의 잘못을 깨우쳐 그의 덕업(德業)을 근면하기 때문에 옛날 남전(藍田)의 규약에 지지 않는 바른 풍속을 이루었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실제로 쌍계정에 금안동 향약(金安洞鄕約)이 보존되고 있다.

특히 정봉채의 중수기를 보면 “이 마을이 수백 년의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명공(名公), 거경(巨卿), 문장(文章), 재덕(才德)이 많은 선비가 배출 되었고, 설재 정선생(雪齋 鄭可臣)을 비롯한 부사 홍공(府使 洪樹), 척약재 김구용(惕若齋 金九容, 1338-1384), 일헌 정심(鄭諶, 1520-1602), 창주 정상(滄洲 鄭詳, 1533-1609/정심의 동생), 반환 홍공(盤桓 洪千璟), 그리고 나의 선조인 어은 정서(漁隱 鄭鋤)와 수우당 최영경(守愚堂 崔永慶) 등의 여러 선생들이 모두 이 정자에서 학문을 익혔다.”라는 내용이 있다.

한편 쌍계정에는 4개의 중수기와 정가신, 사암 박순(思庵 朴淳), 어은 정서(漁隱 鄭鋤) , 홍윤주(洪崙周, 1874년생), 홍승수(洪承受, 1874년생), 정득채(鄭特采, 1882년생), 정우선(鄭遇善, 1883년생), 정순규(鄭淳奎,1884년생), 김기우(金基禹, 1885년생), 정행면(鄭行勉,1904년생), 김희덕(金熙德, 1916년생)의 시가 게액되어있고, 이외에도 쌍계정 중수시 기부자 명단, 사성문중의 의연사실기(義捐事實記)가 게액되어 있다.

아래는 정가신이 공거(貢擧)로 인하여 중국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면서 고향을 생각하며 쓴 시이다.

 

바다 건너 동쪽의 남녘에 금성산이 있는데 海東南有錦城山

산 아래에 초려 두어 칸은 우리 집이네 山下吾廬草數間

골목의 버들과 동산의 복숭아는 손수 내가 친히 심었으니 巷柳園桃親手種

봄이 오면 응당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겠지 春來應待主人還

▲ 박순, 제홍천경쌍계정

한편 쌍계정에는 사암 박순이 지었다는 〈제홍천경쌍계정(題洪千璟雙溪亭)〉이라는 시판이 걸려 있다. 사암 박순(1523-1589)은 당대에 영의정을 하였고, 사암 사후(死後)인 1609년에 홍천경(1553-1632)이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명성을 날렸지만, 사암 생전에는 홍천경을 시의 제목으로 시를 쓸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잡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암 선생 문집에 〈제홍천경쌍계정〉이란 7언율시가 수록된 것을 보면 사암이 지은 시란 것은 분명하다. 다만 홍천경과 당시 영의정 박순이 어떻게 교류하였는지는 알기 어렵다.

탁 트인 정자가 시내를 내려다보며 산문(山門)을 마주하니 臨溪亭敞對山門

좋은 만남이 한 마을에서는 예사로운 일이네 好會尋常自一村

겨우 벼나 조이지만 들판에 술 마시기에는 만족하고 纔足稻粱供野酌

채소와 죽순만 거두어도 소반에 샛밥을 갖출만하네 只收蔬筍備盤餐

단사(丹砂)에 우물 있어 사람들이 장수를 하는데 丹砂有井人多壽

과거 급제자 이름을 걸었으니 습속이 글을 숭상하네 黃甲標名俗尙文

내가 그대를 좇아 함께 결사(結社)를 하니 我欲從君同結社

꽃과 대나무를 나누어도 더불어 정원이 이어지기를 바라네 幸分花竹與連園

▲ 1938년 쌍계정 중수한 이후에 지은 8인의 작품

1938년(무인년)에 중수를 한 후에 지은 것은 보이는 시판이 있다. 연(年), 연(連), 연(烟). 천(天). 연(然)으로 하는 쌍계정중수운을 읊는 8명의 시가 하나의 긴 시판에 수록되어 걸려있다. 그 중에 홍윤주 시를 소개하면서 글을 마친다.

 

탁 트인 쌍계정에서 여러 해를 보내는데 雙溪亭敞幾經年

좋은 만남이 언제나 네 성씨로 이어지네. 好會常常四姓連

선현들이 심은 꽃과 대나무를 우러러 바라보며 瞻仰先賢花與竹

시 읊으며 돌아가다 달을 감상하려니 연기가 끼었구나. 咏歸往賞月兮烟

천추도록 이 땅은 호수와 산이 바뀔 수 없고 湖山不改千秋地

만고에 이 하늘은 거센 바람 궂은비도 막아주네. 風雨攸除萬古天

갱재가(賡載歌)로 도모를 다하려 악기를 타고 또 암송하니 賡載厥謨絃又誦

옛 사람의 안목 지금 보아도 기쁘고 좋구나. 以今視昔眼怡然

한편, (주)시민의소리와 (사)호남지방문헌연구소에서는 담양군과 화순군에 이어 나주의 주요 누정 인 쌍계정, 석관정, 장춘정, 기오정, 영모정, 금사정, 만호정, 벽류정에 걸린 모든 현판을 탈초 및 번역하여 현판완역집 간행과 홍보 영상물 제작에 힘쓰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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