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호남선비를 만나 내일을 이야기하다(5)-백호 임제
오늘 호남선비를 만나 내일을 이야기하다(5)-백호 임제
  • 정선아 기자
  • 승인 2017.10.10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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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조선의 가장 탁월한 문장가 백호 임제

<시민의소리>는 지난 9월 30일, ‘오늘 호남선비를 만나 내일을 이야기하다’의 다섯 번째 순서로 백호 임제(白湖 林悌, 1549~1587)를 알아보기 위해 아침부터 나주에 위치한 백호문학관으로 길을 나섰다.

약속한 시간 오전 10시, 백호문학관에서 이번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오월어머니집 회원들과 일반참여자 등 40여명이 늦지 않게 모였다. 9월의 마지막 날, 날씨는 시원하고 산뜻해져 큰 걱정 없이 문학관 안으로 발을 들였다.

기획전시실이 있는 2층으로 들어서자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문학관 내의 해설사가 우리를 반겼다. 그곳에는 백호의 친필로 작성된 진품의 시 4점, 문집, 여행기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백호문학관은 국비를 들여 2013년에 개관해 한 달에 약 200~300여명의 방문객이 다녀가고 있다고 한다.

16세기 조선의 가장 탁월한 문장가, 풍류기남아 불리는 백호 임제

1549년 나주 회진에서 태어난 임제는 어려서부터 자유분방하여 기질이 호방하고 예속에 구속받지 않아 창루(娼樓)와 주사(酒肆)를 배회하며 살았다. 20세가 넘어서 성운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23세에 어머니를 여읜 후 현실세계에 뛰어든 그는 당시 혼란했던 시대를 비판하는 정신을 지녀 ‘풍류기남아’라 일컬어졌다.

임제는 여러 번 과거에 번번이 떨어지고, 학업에 정진해 ‘중용’을 800번 읽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리고 1577년, 29세에 임제는 문과에 급제한다. 이 무렵 임제는 사람이 아닌 물건을 빚 대어 당시 혼탁한 정치세계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썼는데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수성지(愁城誌)’, ‘화사(花史)’ 등이 대표적인 3편의 한문소설이다.

이 당시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등극하면서 사림파들을 대거 등용하지만 분당의 조짐이 노골화되어 가고 있었고, ‘수성지’와 ‘원생몽유록’에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이 작품의 저변에 깔려있다.

임제는 흥양현감·서도병마사·북도병마사·예조정랑을 거쳐 홍문관지제교를 지냈지만 10년간의 관직생활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익만을 취하려는 속물들의 비열한 모습들이 호방한 그에게 환멸만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임제는 그 스트레스를 여러 곳을 여행 다니며 시를 쓰면서 풀었다. 기획실에 전시되어 있는 ‘남명소승’은 그가 청년기에 문과에 급제 후 고향을 떠나 제주목사였던 부친 임진에게 인사 차 제주에 왔다가 3개월간 유람하며 쓴 기행문으로 일기처럼 풀어썼다. 이에 대해 해설사는 “여기에는 그가 제주도를 여행하며 풍토, 지리, 언어 등 16세기 제주에 대해 풍부하게 기록하여 당시 제주 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여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가 쓴 제주도 관련 기행문 중에는 귤을 주제로 한 재미난 책도 있었다. ‘귤유보’에 대해 해설사는 “내륙에서 귤을 먹었을 땐 맛이 없었는데 제주도에서 귤을 먹어보니 너무 맛있어서 여러 종류의 귤을 먹고 쓴 책이다”고 알려줬다.

임제는 여행하면서 가족들에게 편지를 많이 썼다고 한다. 이를 토대로 백호문학관 1층에는 글짓기 시화전을 통해 초등학생들이 가족에 대해 쓴 편지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 '청초 우거진 골에'

중년기에 들어 그가 서도병마사로 임명되었을 때 부임하는 길에 조선 중기의 명기, 황진이와 조우를 위해 찾아갔다. 하지만 황진이가 이미 단명했다는 말에 임제는 그의 무덤을 찾아 그를 위한 ‘청초 우거진 골에’라는 유명한 시조를 남기며 제사를 지냈다.

이 시조와 제사로 인해 임제는 부임도 하기 전에 파직을 당했다고 알려졌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임제는 1583년부터 1584년까지 평안도 도사로 지냈다.

황진이 이외에도 임제는 기생 한우(寒雨)와 시조를 주고받은 일화, 평양 기생과 평양 감사에 얽힌 일화도 유명하다.

임제는 스승 성운이 세상을 등진 후 고향인 회진리에서 39세의 젊은 나이에 떠났다. 그는 임종을 2개월 앞두고 스스로를 애도하는 자만시를 지었으며 여기서 그는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속세를 벗어나 신선 세상으로 떠난다’고 말하고 있다.

호남제일의 명촌 ‘회진’

나주에서 유일하게 관향(貫鄕)에 존속하고 있는 나주 임씨 대종가가 630여 년간 회진에 살고 있다.

백호문학관도 나주시 다시면 회진길에 위치해 있다. 여기서 ‘회진’은 영산강을 중심으로 마한 때부터 강한 세력이 존재했다. 아마 기가 막히는 풍수지리의 영향인 듯하다. 실제로 ‘회진’은 노령산맥이 서남방향으로 줄기차게 달리다가 금성산을 이루고, 신걸산에 이르러 영산강으로 한걸음 내디딘 곳으로 2천년의 역사문화의 보고 ‘호남제일의 명촌’으로 알려져 있었다.

백제~고려·조선시대 초기까지는 1,000여 년간 회진토성 내에 회진현(백제, 두힐현)의 치소(관아)가 있어 행정의 중심지이고 군사와 교통의 요충지였다.

현재는 조선 초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회진 현이 폐현되고, 3개면이 생길 때 시랑 면에 속하게 되어 현재까지 마을 이름으로만 남아있다.

임제가 글을 배우고 시작을 즐겼던 영모정

▲ 영모정

우리는 백호문학관을 나와 5분정도 걸어서 전라남도 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는 영모정(永慕亭)에 도착했다. 영모정에 대한 설명은 나주 임가인 임 형 선생이 해설을 맡아주었다.

▲ 임 형

영모정은 나주 임씨 종중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었다. 임 선생의 말에 따르면 이곳은 귀래정(歸來亭) 임붕(林鵬)이 1520년에 창건했고, 백호 임제가 글을 배우고 시를 지으며 즐기던 곳이란다.

처음에 영모정은 임붕의 호를 따서 귀래정이라 불렀지만, 임붕의 아들 임복과 임진이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재건하면서 길 영(永), 그리워할 모(慕)를 이용하여 영모정이라 바꾸었다. 현 건물은 30~40년 정도 됐다고 한다.

영모정 마루에 앉아 앞을 바라보니 영상강이 보이며 그 경치가 매우 뛰어났다. 이에 대해 임 선생은 “4대강 사업으로 죽산보를 막으니 수량이 더 많아져서 경치가 좋아졌다”고 말했다. 이어 “1977년도까지 이곳은 배가 다녔던 곳이다”고 덧붙였다.

현재 영모정은 나주 임가의 종회로 쓰이고 있으며 평상시엔 개방을 하지 않고 회의할 때만 사용하고 있다.

임제의 묘소, 신걸산 제일의 명당

▲ 신걸산에 위치한 백호 임제의 묘소

영모정에서 나와 임제가 묻혀있다는 묘소를 가기 위해 차로 5분여 동안 신걸산(信傑山)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면서 임 선생이 무려 300여 개가 넘는 계단을 올라야 한다고 겁을 준다.

계단을 다 오르고 풍경을 내려다보니 후들거리는 다리는 뒷전이다. 임 선생은 “신걸산 일대에는 나주 임씨의 선산이 능선마다 자리하고 있는데 특히 임제의 묘는 들판과 산맥이 옴(Ω) 모양을 만들며 영산강, 회진마을, 구진포, 가야산, 국사봉까지 보이는 제일의 명당이다”고 설명했다.

묘 앞쪽 옆에는 두 개의 사람 형태 비가 세워져 있다. 이에 대해 임 선생은 “하나는 조선후기 정계와 사상계를 이끌어간 인물인 임제의 외손자 허목이 세웠고, 최근에 세운 다른 하나에는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마라’는 유언을 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고 설명하며 탐방을 마쳤다.

백호 임제의 삶은 짧았지만 그의 문학은 영원히 남아 지금까지도 우리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이 캠페인은 지역발전신문위원회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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